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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우리는 동부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동부여 흥망성쇠,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돼 있어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7-13 09:13:4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태백일사 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본시 북부여로 시작했다. 그런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동명국의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4세 해우루 단군에게 물러나라고 겁박해 해우루가 병을 얻어 죽었다. 5세 단군으로 즉위한 고두막은 해우루의 동생 해부루를 제후로 격하시켜 가섭원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부른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기록이다. 
 
38년간 재위했던 초대 임금 해부루(解夫婁)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서 내려준 금와(金蛙)를 아들로 삼아 왕위를 넘겨준다. 금와는 41년간 통치했는데 고주몽의 모후인 유화를 부인으로 삼았다. 금와의 장남 대소(帶素)가 3대 왕이 되어 28년간 통치했다가 동생들과의 골육상쟁의 희생양이 된다.
 
서기 22년 고구리의 대무신제가 쳐들어와 동부여의 왕(대소 또는 대불)을 죽이자 왕의 동생들과 군사들이 결사항전을 벌여 고구리군을 포위했다. 하지만 대무신제가 천지신명에게 빌어 짙은 안개가 끼자 그 틈을 이용해 몰래 탈출에 성공해 고구리로 돌아갔다. 이후 이야기는 「고구리사초력」에는 약간 다르게 기록돼 있다.
 
▲ [사진=필자제공]
 
먼저 「삼국사기」와 「가섭원부여기」에는 “22년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막내아우는 형이 괴유에게 죽자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는 자기를 따르는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마침 사냥 나온 해두(海頭)국의 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에 도읍을 정하니 이가 갈사왕(曷思王)이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가섭원부여기」에만 “갈사는 태조 무열제 융무(隆武) 16년 8월에 도두(都頭)왕이 고구리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于台)라고 부르도록 하고 집을 하사하니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하는 동부여후(東夫餘候)에 봉했다”고 추가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고구리사초략」에는 갈사국 왕의 이름은 산해(山觧)로 금와 왕이 유화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해소(觧素)의 아들이다. 산해가 압록곡에 사냥 나온 해두왕에게 같이 사냥하자고 청했는데 오만무례하기에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백성을 빼앗아 하북 포륜(布倫) 땅을 다스리며 살겠다고 청하기에 대무신제가 허락했다고 한다.
 
▲ 모친을 닮아 용모가 수려했던 호동왕자 [사진=SBS, 필자제공]
늘 대소 왕의 무도함을 간하면서 고구리를 두둔했던 해소가 죽자 동생 해루(解婁)가 고구리로 귀의해 온조(溫祖)를 도왔다. 해소의 아들 산해 또한 이때 귀의해 딸을 후궁으로 바쳤는데 그녀의 몸에서는 향내가 나고 살결도 물고기처럼 희고 깨끗해 대무신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녀는 요염하기도 했지만 덕망이 있어 황후가 되어 자명고와 낙랑공주로 유명한 호동왕자와 신명선제(再思)의 모후가 된다.
 
같은 해 7월 갈사왕의 사촌동생은 나라사람들에게 “우리 선왕(대소)께서 돌아가시고 나라가 멸망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 왕의 동생은 도망가 갈사에 도읍을 정했다. 나 역시 어질지 못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1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해오니 대무신제는 그를 안서(安西)대왕으로 삼아 봉해 연나부(掾那部)에 속하게 했다. 그의 등에 낙(絡) 무늬가 있다하여 낙씨 성을 내려주었다.
 
「가섭원부여기」에는 “뒤에 차츰 자립해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바로 연(燕) 땅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명치제(문자왕) 3년(494) 갑술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는 기록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고구리사초략」에 의하면 낙문은 해소의 동생인 해만의 아들이라고 한다. 낙문의 귀의 이후 동부여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동부여는 동부여대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유화부인 소생의 왕자들이 동부여를 떠나 갈사국을 세우고 고구리로 귀의한 것이지 동부여 자체가 망해 그리 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삼국사기」와 「가섭원부여기」에 대소 왕의 죽음 이후 동부여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혼돈될 수가 있다.
 
「고구리사초략」에 “대무 24년(51) 신해 3월 동부여에서 태사 왕문이 죽자 반란이 일어나니 대무신제가 이를 평정하고는 여왕 고야(高耶)를 잡아다가 후로 삼음으로써 동부여의 47국 모두가 고구리로 편입됐다. 해부루-금와-대소-고야를 거치며 4대 110년을 이어왔는데 중간에 대불(帶弗)이 19년간 보위를 훔쳤다”고 기록돼 있다.
 
즉 동부여가 B.C 59년에 세워졌다는 것인바 이는 「가섭원부여기」에 기록된 해부루에 의한 동부여 건국년도인 B.C 86년 을미년과는 27년 차이가 난다. 이 역시 「태백일사」와 「삼국사기」의 고주몽의 출생년도 20여년 차이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대무신제를 이은 민중제 4년(67)에 동부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재사(再思) 등을 보내 이듬해 정월에 평정했다가 10월에 다시 어지러워져서 장수를 보내 진압했다. 5년(72) 5월 동부여의 속국 조나(藻那)가 반란을 일으켜 장수를 보내 평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동부여도 낙랑(樂浪)처럼 비록 고구리에 복속되기는 했으나 고구리에 쌓인 원한이 많아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부족이었다.
 
▲ 구리시에 있는 광개토호태왕 동상과 비석 [사진=필자제공]
 
대무신제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동부여가 광개토호태왕 비석의 문구에 다시 언급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년 경술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해 조공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친히 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했다. (부)여성에 도착해 공격하니 (중략) 드디어 항복하므로 왕 은보처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중략) 무릇 쳐서 깨뜨린 성이 64개요 촌락이 1400이었다.”
 
아래 「고구리사초략」에 비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년(410) 경술 정월 (북연의) 풍발을 정벌하는 의논을 하던 중 동부여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에 대한 답레로 (부)여성(餘城)을 토벌해 그 왕 은보처(恩普処)를 붙잡아서 돌아왔다. 64성 1400여 촌의 수장 모두를 다른 이들로 갈아치웠고 이 일로 풍발을 치는 일을 멈추었다” 동부여의 지방수령 모두를 친고구리파로 완전 물갈이하는 방식으로 복속을 시켰는지 이후 동부여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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