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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유방의 죽마고우 노관과 위만의 망명

고조선 전성기로 조작된 위만조선 세운 위만…망명 배경에 대해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9-07 12:35:4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단군의 역사는 역사가 아닌 신화가 됐다. 하지만 불과 86년간 존재했던 위만(衛滿) 정권은 한반도 최초로 국가체재가 갖춰진 시대이며 고조선의 전성기로 조작됐고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위만조선이라 불리게 됐다. 그 허구를 논하기에 앞서 위만의 망명과 관련된 노관의 망명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죽마고우였던 당시 연(燕)왕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하자 부장이었던 위만은 호복(胡服)을 입고 상투를 틀고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노관과 위만의 망명지가 왜 달랐는지에 대해선 상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이 위만이 조선에 와서 훗날 세운 나라를 위만조선이라 한다.
 
유방의 죽마고우 노관의 망명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세상이 안정되자 창업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정권욕에 눈 먼 여(呂) 후의 농간이 크게 작용했다. 유방은 얼굴이 새처럼 생겨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어 그런지 의심이 많고 자기보다 뛰어난 부하의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두려워했다.
 
▲ 잘못된 국통을 국민들에게 방영하고 있는 EBS [사진=EBS, 필자 제공]
 
가장 대표적인 숙청 대상이 항우를 물리친 장수 한신이었다. 유방의 통일에는 군사적으로 한신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우가 사라지다보니 유방에게 한신은 이제 자신의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만 부각된 것이다. 결국 토사구팽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한신은 참수되고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원래 전국시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범려(范蠡)가 월왕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한 말이다. 한신이 이를 인용해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다. ‘빠른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는 삶기고,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넣어두고, 적국이 깨지면 모신은 죽는다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삶기겠구나(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고 한탄한 말이다.
 
한신 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전공을 남긴 팽월과 경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팽월은 고기가 소금에 절여져 그릇에 담겨 제후들에게 돌려졌다. 가장 강력했던 장수 셋을 제거하고 난 후, 이제 고조의 칼날은 친구인 연왕 노관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노관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방과 노관은 부친끼리도 절친한데다가 본인들도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나 함께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였기 때문이다. 노관은 유방이 거병하기 전부터 매일 함께 지냈으며 유방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의 장군이 되었고 항상 시중을 들어 유방은 다른 신하들보다 훨씬 노관을 총애했다. 유방은 신하들의 적극 추천을 받아 노관을 연왕으로 임명했다.
▲ 한 고조 유방의 초상화 [사진=필자 제공]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과 노관이 함께 협공하는 과정에서 “노관이 진희와 흉노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고조가 그 사실여부를 확인코자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노관은 당시 고조가 병들어 여 왕후가 정권을 쥐고 창업공신들을 주살하고 있음을 무척 두려워했다. 이로 인해 고조는 노관을 더욱 의심하게 됐다.
 
노관을 반역으로 단정 지은 고조는 장수를 보내 연 땅을 수차례 공격해 노관의 부하들을 사로잡고 흉노와의 국경인 장성까지 압박해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노관은 고조가 쾌차하면 사죄하겠다고 했지만, 고조는 병이 악화돼 4월에 죽고 태자가 즉위해 여 태후의 세상이 되다보니 노관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흉노에 투항해 살다가 1년 후 죽었다.
 
유방의 아들 태자 영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유약해 모든 실권은 여 태후가 쥐고 여씨 천하가 됐다. 현실적 역사를 존중한 사마천은 ‘사기’ 에서 ‘고조 본기’ 다음 ‘혜제 본기’ 대신에 ‘여후 본기’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원칙과 명분을 중시한 반고가 쓴  ‘사기’ 에는 ‘혜제 본기’로 되어 있다.
 
노관의 부장 위만의 망명
 
노관이 무리를 거느리고 흉노로 망명할 때 부장이었던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이 노관과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측근은 아니고 직급은 꽤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래 기록에서 보듯 위만이 별도로 북부여에게 망명을 요청해 해모수 단군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단군이 결단해야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꽤 중량급 인사였음이 분명하다.
 
‘북부여기’에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시조 해모수 단군 45년(B.C 195년, 병오)에 “연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 위 기록의 운장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지명이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위만조선 [사진=필자 제공]
 
樂浪郡(낙랑군),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유주)。應劭曰:「故朝鮮國也。」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운장이 있다) 縣二十五:朝鮮(조선현),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 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점제),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帶方(대방),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둔유),昭明,南部都尉治。鏤方,提奚,渾彌,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東暆,不而,東部都尉治。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사기’ 와 ‘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위만의 출자에 대해 “본시 전국시대 연나라 사람이고 연나라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 및 조선을 속지로 점령 경영하면서 관리를 두어 변방요새를 수축했다. 고조 5년(B.C 202) 한나라 건립 후 그 땅이 멀어 지키기 어려워 요동지구의 먼 요새를 중수해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고 한나라의 모든 제후국을 연나라 관할로 예속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
 
위만은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 1000명을 이끌고 망명하면서 호복(胡服)을 입고 상투를 틀고 패수를 건너 망명했다고 하는데 호복과 상투 풍습들은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고유 풍습이기 때문에 위만은 동이족이란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을 잠재우기 위해 연나라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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