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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노관과 위만의 연(燕) 땅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연 위치, 중국 주장과 달리 산서성 남부였다는 근거 많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9-14 02:57:32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한나라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며 개국공신인 연왕(燕王)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부장 위만이 무리 1000명을 거느림과 동시에 호복을 입고 상투를 틀며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노관이 다스렸던 연(燕) 땅은 어디였을까. 중국에서는 북경이 연경(燕京)이고 하북성 일대가 연나라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 따라 북경에 있던 위만이 청천강(패수)을 건너 평양에 있던 기자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중화사대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강단사학계의 일치된 이론이다. 재야사학계는 대체로 북경에 있던 위만이 하북성 동쪽 난하(灤河=패수)를 건너 번조선의 기준 왕이 있는 창려(昌黎=왕검성)로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패수의 위치를 두고 서로 식민사학 유사사학 하면서 자기네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연(燕) 땅의 위치는 어디인가
 
패수의 위치를 밝히기에 앞서 여러 기록을 통해 연 땅의 위치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서재종의 국도성기(國都城記)를 인용한 『사기 정의』에 “주 무왕이 소공 석(奭)을 연에 봉했다. 그 땅은 연산의 들(燕山之野)에 있다. 옛날 나라이름을 여기서 얻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중국은 그곳이 지금의 북경 부근이라고 우기고 있다.
 
▲ 재야사학 주장 위만 망명도(왼쪽)와 중국과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평양 위만조선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맹자의 <만장장구 하(萬章章句下)>에 “천자의 땅은 사방 천리이고 공·후는 모두 사방 100리이며 백은 70리이고 자·남은 50리이니 무릇 네 등급이다(天子之制地方千里 公侯皆方百里 伯七十里 子男五十里 凡四等)”라는 기록이 있어 전체 주나라 땅이 천리 정도였고 제후인 소공(召公)의 연은 백리 정도였다는 사실과 당시 주나라는 지금의 시장·군수 정도의 제후를 나라(小國)의 왕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서주 때는 호경(鎬京=서안)이고 동주 때는 낙양이었다. 주나라 땅이 천리뿐이었으니 영토는 섬서성 또는 하남성의 황하주변 일대였다. 백리인 연은 제후들 중 가장 북쪽에 있다 했으니 대략적으로 섬서성 또는 산서성 중남부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지 전국시대 당시 연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사기』‘소진(蘇秦)열전’에 “연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루번이 있고,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와 역수가 있다. 땅은 방 2000여 리다. (생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裏。(생략) 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栗之利。)”는 기록이 있다.
 
연의 서쪽에 있다는 운중과 구원은 『한서지리지』에서 병주(并州)에 속하는 군이다. 북쪽에 있는 루번 역시 병주의 안문군에 속하는 현이다. 같은 병주에 속하는 상당(上黨)군이 산서성 동남부 장자현 일대이니 병주 역시 그 부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전국 7웅의 지도 [사진=필자 제공]
 
뿐만 아니라 고대 한·중간의 경계인 갈석산이 연의 남쪽에 있다고 했다. 『한서지리지』에 “호구(壺口)와 뇌수(雷首)는 대악(大嶽)까지 이르고 지주(厎柱)와 석성(析城)은 왕옥(王屋)까지 이르며 태행(太行)과 항산(恒山)은 갈석(碣石)까지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는 문구가 있다. 안사고가 주를 단 지명들은 아래 ‘대청광여도’에서 보듯이 모두 산서 남단 황하변에 있다. 그렇다면 그 북쪽에 있다는 연 땅은 대체 어디인가.
 
“(안사고의 주) 뇌수는 하동(河東)군 포판(蒲阪) 남쪽에 있고, 대악은 즉 소위 악양(嶽陽)이란 곳이다. 지주는 섬(陝)현 동북쪽에 있고, 석성산은 호택(濩澤) 서남쪽에 있고, 왕옥은 원(垣)현 동북쪽에 있다. 태행산은 하내(河內)군 산양(山陽)현 동북쪽에 있고 항산은 상곡양(上曲陽) 서북쪽에 있는데 두 산이 연속으로 연결되어 동북쪽으로 갈석에 접해 해로 들어간다”
 
▲ 청색은 <한서지리지>의 갈석산 관련지명들, 검정색은 기타 기록의 지명들 [사진=필자 제공]
 
또한 『한서지리지』에 연 땅은 “燕地,尾、箕分壄也。武王定殷,封召公於燕,其後三十六丗與六國俱稱王。東有漁陽(어양)、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遼東(요동),西有上谷(상곡)、代郡(대군)、鴈門,南得涿郡(탁군)之易、容城、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郷、新昌(요동),及勃海(발해)之安次,皆燕分也。樂浪(낙랑)、玄菟(현토),亦冝屬焉。”는 기록과
 
『사기』‘흉노열전’에 “연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상곡군)에서 양평(요동군)까지 설차해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호로부터 막았다(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置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는 기록의 지명들이 대부분 유주(幽州)에 속한 군들이다. 유주는 산서 남부와 하내군 이외 북부 하남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연의 강역을 알 수 있는 다른 기록으로는 『사기』에 “제 환공 23년(B.C 663) 북방 만족인 산융(山戎)이 연을 침공하자 연은 곧바로 제(齊)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를 응낙한 환공은 연에 출병해 멀리 만족을 고죽(孤竹) 땅까지 몰아내고는 군사를 돌렸다”는 기록과
 
제 환공이 회맹(會盟)을 주도하며 “나는 이미 남으로 소능(召陵)까지 원정해 웅산(熊山)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과 이지(離枝)와 고죽(孤竹)까지 토벌했다.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토벌코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는 두 기록을 합치면 연의 북쪽 경계가 고죽이란 말인데 고죽은 요서군으로 지금의 산서 서남부 영제(永濟)시이다.
 
참고로 당시 전국 7웅 중 가장 세력이 강했다는 제 환공이 남쪽까지 원정했다는 소릉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 밑에 있는 탑하(漯河)시이다. 이렇듯 전국시대의 강역 역시 황하주변에서 멀리 못 갈 정도로 무척 작았고, 이러한 동이족과의 세력의 열세는 한족(漢族)의 통일국가라는 명나라 이전까지 지속된다.
 
위 기록은 강단사학계에서 위서라고 하는 <단군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36세 매륵 단군 52년 무진(B.C 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을 정벌했다. 이를 연이 바로 제에 알리니 제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여기서 고죽과 연과 제는 무척 가깝고 고죽국은 연과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의 도읍이 북경이라는 역사왜곡에 앞장서고 있는 연경맥주 [사진=필자 제공]
 
이러했던 연의 위치가 지금의 북경 부근이 아니라 바로 산서성 남부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해주는 사료와 유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요서(遼西)군을 상징하는 고죽국 백이·숙제의 무덤(일명 夷齊墓)과 한사군의 핵심 낙랑(樂浪)군의 위치를 밝혀주는 패수(浿水)다. 이 요서군과 낙랑군이 바로 유주에 속하는 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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