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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32>

송나라 때 당서 배포 통해 역사왜곡 이뤄져

역사도 유물을 위조, 조작할 수 있지만 문화 흐름과 역사인물은 불가해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10-05 08:11:51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지난 9월 말 스카이데일리의 박선옥 부장으로부터 베트남 하노이에 사는 독자 김홍업 님이 졸업 40주년 수학여행 때보았던, 부여 정림사지 5층 탑에 새겨진 소정방(蘇定方) 공적기와 대당평제비문이 부여 정림사에 있으니 하나 하나 실증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느냐는 질의를 보냈다는 말을 전해 받았다.
 
이 질문은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신라·가야·()가 대륙에 있었던 터라 이를 제대로 밝히려면 책이 하나로도 모자랄 정도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김유신(金庾信), 경주의 신라 왕릉도, 왜곡(歪曲)돼 실증(實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여 우리 역사는 언제부터 왜곡의 길을 걷고 있었는지, 국내 사학자에게 물어도 지금까지 우리 동이 역사가 언제부터 왜곡되었는지, 그 시기와 방법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이다. 필자 역시 정확한 답을 단답식(單答式)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왜곡(歪曲)된 역사를 가르치며 전파(傳播)시켜 왔기에 지금도 국가 영토에 맞춰 서술하고 있다. 소정방(蘇定方)의 공적기(功蹟記) ‘대당평제비문(大唐平濟碑文)’이 어떻게 부여 정림사에 세워졌는지는 백제본기를 살펴봐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우리 민족사를 현재의 국가 영토에 맞춰 서술(敍述)하는 국가사관(國家史觀)에 대해서는 국사(國史)가 아니기에 섣불리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패망한 곳이 반도가 아닌 대륙이고,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싸운 곳이 대륙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나라 때부터 우리 역사, 특히 백제의 역사를 대륙에서 반도로 옮기며 김유신(金庾信)의 행적(行蹟)을 반도로 가져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번 질문을 통해 이에 대한 연구를 더 하고 당시 삼국통일의 주역인 삼국의 상황을 더 살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접근이 용이(容易)한 것은 모든 사서를 인정하면서 김유신(金庾信)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 그 첩경이 될 것이다. 김유신은 백제, 고구려를 패망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계보(系譜)에 의한 김유신은 반도인(半島人)이 아니고 대륙인(大陸人)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金庾信傳)에서 그 내력을 살펴보면, 김유신의 부친은 서현(舒玄;)에는 김도연(金道衍)이고, 조부는 무력(武力)이며 증조부는 구해(仇亥)이고 12대 조부는 수로왕이며, 헌원의 후예로 소호(少昊) 씨의 자손으로 밝혀졌다. 반도인(半島人)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삼국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세운 곳이 반도가 아니고 대륙이며 반도에 있는 왕릉과 비문도 역사 왜곡을 위해 세워진 것이 많고 부여 정림사의 소정방의 공적기 대당평제비문(大唐平濟碑文)’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으니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어디에 있었나
 
소정방(蘇定方)의 공적기(功蹟記) ‘대당평제비문(大唐平濟碑文)’이 부여(夫餘) 정림사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기 위해선 먼저 우리나라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伽倻()가 어디에서 세워졌으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국가 영토에 맞추어 서술(敍述)하는 국가사관(國家史觀)에 의한 것이기에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의 역사가 아니고, 대륙(大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가장 잘 알려진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예를들면 우리는 반도 사람으로 배워서 알고 있으나 반도 사람이 아니다. 사서(史書)에 의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은 분명히 서화(西華항성(項城덕안(德安무주(武州)의 동쪽 강회신라(江淮新羅:西新羅)인 왕신라(王新羅)의 사람이다.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아직도 대륙의 사로신라(斯盧新羅:王新羅=西新羅)와 신라 서라벌(徐羅伐) 경주(慶州)의 칸()이 다스리는 칸신라(干新羅)의 역사도 모르고 오로지 반도의 신라(新羅)만을 말하고 있는데 제대로 우리 역사를 알고 말을 하라고 하고 싶다.
 
분명히 사서(史書)에 기록된 김유신은 영락기(永樂紀:205~283, 서기 595~673사이에 살았던 것인데, 김유신(金庾信)의 활동무대를 밝히지 않고 무턱대고 경주인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중국 25()’ 동이(東夷),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그 어느 곳에서도 김유신(金庾信)이 반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반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든다면, 첫째 김유신의 가계(家系):족보(族譜)의 체계상 반도인이 될 수 없다.
 
둘째 김유신은 동이민족 체계상 반도인(半島人)이 될 수 없다. 셋째 김유신(金庾信)은 백제와 당()과의 전쟁터인 지명(地名)에 의해서도 반도인이 될 수 없다. 넷째 김유신은 동이민족의 문명사(文明史)에 의해서도 반도인이 될 수 없다. 가계(家系)는 조작될 수도 있고, (:)도 가묘(假墓)를 만들 수 있으며 지명(地名)도 조작 또는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명(文明)의 흐름 만큼은 시작과 이동경로(移動經路)가 뚜렷한 것이니 조작할 수가 없는 것임에도 사서(史書)를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한다면서 부정(否定)하고, 왜곡(歪曲), 역사를 그르치게 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김유신은 삼국사기삼국유사’, ‘중국25동이전 기록에도 반도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를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당시 부여(夫餘)는 내지성(奈祗城)으로 백제의 지명(地名)도 몇 안 되는 지명(地名)을 가지고 백제(百濟)가 반도 안에 있었다는 것은 백제가 하수(河水)의 남쪽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으로서 보익(輔翼)을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홍가(成帝鴻嘉) 3(서기전 18)인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소정방(蘇定方)대당평제비문(大唐平濟碑文)’이 부여(夫餘) 정림사에 세워진 것도 역사를 왜곡하며 백제사(百濟史)를 반도(半島)로 옮기는 일환의 하나로 보고 있다.
 
5세기 이전 신라(新羅백제(百濟(가라(加羅:伽倻)는 서화(西華) 동쪽에만 있었고 반도(半島)는 서기 32~503년 이전 고구려(高句麗) 칸이 다스리는 간지(干地)를 숨기고 있다.
 
고일본(古日本)과 신일본(新日本), 지역도 다르다
 
우리 역사가 대륙사라는 것을 좀 더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니고 대륙에 있었음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고일본과 신일본으로 구분해서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일본(古日本)은 중국이 내해(內海)라고 하는 황해의 서쪽에 있는 타이완(臺灣)이고, 신일본은 려해(麗海;(東海)의 동쪽 지금의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살펴 본대로 고일본(古日本)은 서기 670년 왜()가 국호(國號)를 변경(變更)했는데 고일본(古日本)9세기(882)까지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와 교류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일본(古日本)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와 다르다. 이것이 역사 연구의 어려움이 되고 있다.
 
9세기 이전 일본(日本)670년 이전의 왜()를 규명(糾明)해 위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3백년 이전의 왜()의 위치를 보면,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으며 재회계동야지동(在會稽東冶之東), 여담이주애(與儋耳朱崖)의 기록이 있다.
 
또한 하후소강지자봉어회계단발문신이피교룡지해금위수인(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短髮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 위여왕비미호여구노국(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 등이 기록돼 있다. 여기서 지명(地名)으로 회계(會稽담이(儋耳주애(朱崖)가 있는데 회계는 절강성(浙江省), 담이는 해남도(海南島)에 있다. 4개의 지명(地名) 가운데 두 개가 양자강(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이전의 사기(史記)’한서(漢書)’에는 기록이 없다. 왜 그런 것인지. ‘한서(漢書)’ 28에서 낙랑해중유왜인(樂浪海中有倭人)’이란 기록이 있고, ‘한서(漢書)’ 7에는 파담이 진번군, 담이 본남월지, 진번군 조선지(罷儋耳 眞番郡, 儋耳本南越地, 眞番郡, 朝鮮地)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담이(儋耳)가 남월(南越)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서 양자강(揚子江) 이남에 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일본(新日本)은 현재의 일본을 말한다. 현재의 일본은 1403년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명()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인준을 받았다.
 
신일본(新日本)의 역사는 1403년부터이고 그 이전은 야마토(大和)가마쿠라(鎌倉)->전국시대를 거쳐 왔다고 하는데 고일본(古日本)의 역사가 정립(定立)하려면 새로운 연구가 있어야 한다. 고일본(古日本)6세기 이전 왜()의 지역인 양자강(揚子江) 이남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지명(地名)이나 유물(遺物)은 변경해 만들 수 있다. 몇 백 년의 역사(歷史)도 유물(遺物)을 위조(僞造)하고 조작(造作)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文化)의 흐름과 역사인물(歷史人物)에 대해서는 어려운 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자열전담이노자이(老子列傳儋耳老子耳)라고 분명히 노자(老子)는 담이(儋耳)라고 했다.
 
즉 왜()가 건국되기 전 고조선시대 담이(儋耳) 진번군에 의해서 담이(儋耳)에서 노자(老子)가 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와 회계(會稽), 담이(儋耳)에 의해서 3세기 이전 왜()는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국가(國家)이지 현재 일본지역의 국가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3세기~639년 사이의 왜()의 위치는 송(,420~479) 때 쓰인 후한서(後漢書)’에는 회계(會稽주애(朱崖담이(儋耳이주(吏洲단주(澶洲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이 있으며 양(,502~557) 에 쓰인 남제서(南齊書)’에는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고 했다. (,627~649)때 쓰여진 남사(南史)’에서도 담이(儋耳), 주애(朱崖)가 있다.
 
300~649년 사이에 기록된 곳에서도 그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회계·담이·주애·대방이 있으며 이주(吏洲)와 단주(澶洲),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이 더 있을 뿐이다. 이주(吏洲)는 태주(台州)에 의해 대만(臺灣)이 되었고 야현(冶縣)은 태주(台州), 단주(澶洲)는 주산(舟山)으로 되었다고 보여지며 해남도에 담()과 애()가 있고 절강성(浙江省)에 위(:)가 있다.
 
649년 이전에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이 더욱 분명할 따름이다. 이 왜(:)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다면 그 일본이 현재의 일본이 될 수 있겠는가? 670년에 바뀐 일본은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왜()지역에 있었던지, 쫓기어 갔다면 이주(吏洲)였던 대만(臺灣)이 일본이 되었을 것이지, 결코 현재의 일본 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위에서 보듯이 고일본(古日本 670~9세기)과 신일본(新日本 1403~2019)은 분명히 다르다. 이름이 같다하여 하나로 보는 것이나,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과 이를 받아들여 왜곡하는 신일본이나 모두 동이민족의 왜곡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고일본(古日本)은 분명히 양자강(揚子江) 이남에 있었으며 고조선(古朝鮮)의 일부이고 한때 진번군(眞番郡)으로 부르던 지역이었고, 서기전 50~서기 670년까지, 왜노국(倭奴國)도 왜(;()로 되었다가 670~9세기까지 일본 국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신일본(新日本)은 현 일본지역에서 1403년 명()으로부터 받은 국호이며 그 이전은 대화주(大和州)로 있었다. 반도에서 서기전196~서기32년까지 낙랑국(樂浪國)사람은 나라’, 32~503년 사이 고구려 때 건너간 사람은 고리’, 503~936년 사이 동신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시라, 서라로 부르고, 4~6세기 백제 총독부(공주지역)의 축출(逐出)에 의해서 건너간 사람은 백제(百濟:맥제)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日本)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이전은 왜노국(倭奴國)의 후속(後續)국가이다. 왜노국(倭奴國)의 기록은 후한서() 항목(項目), ‘구당서의 왜항목, ‘당서(唐書)’ 일본항목에 기록되어 있는데, 왜노국(倭奴國)이 회계(會稽), 담이(남월), 주애(朱崖)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670년 왕계보가 당서 일본 항목과 남사(南史) 이전 왜()항목에서 동일하지 아니함은 어떤 이유일가? 구당서를 두고 당서를 배포했던 송()의 의도 또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이로써 역사왜곡(歷史歪曲)이 이뤄진 것을 알 수가 있다.
 
서기 649년 이전 기록에서 왜왕(倭王)으로 기록된 인명(人名)이 당서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552년까지 당서(唐書)에 기록된 왜왕이 62세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과연 가능한 것인가? 고구려·백제·신라와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문제가 있다. 남사(南史) 이전의 왕계보(王系譜)와 당서(唐書)의 왕계보(王系譜)가 다름은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以上吳在成,‘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93~96().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단군을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를 참고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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