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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42>

전쟁 연속은 피폐시대로의 전락(轉落)을 가져와

지나(支那)삼국과 남북조시대 역사 (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1-12 21:19:20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우리의 대륙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위해 지나
(支那;中國)의 전한시대(前漢時代)와 후한(後漢)시대의 역사를 피상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전한은 서기전 202~서기 8년이라 하고 후한시대를 서기 25~220년 시대로 구분하는데 전한(前漢)시대에는 예맥(銳麥;濊貊)이 철기(鐵驥)로 무장한 기마군단을 이끌러 대륙을 지배한 전성시대였다.
 
지나(支那;中國)는 예맥(銳麥;濊貊)을 당하지 못하다가 서기전 500년경부터서야 철()의 생산이 시작되어 예맥(銳麥;濊貊)과도 전쟁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한무제(漢武帝)시대가 되어서 주철(鑄鐵) 즉 주물(鑄物)기술이 개발돼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화북지방(華北地方)이 산들은 민둥산(禿山)이 되었다. 그것은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산들을 벌거벗을 때까지 벌채(伐採)됐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철제무기(鐵製武器)와 농구(農具)의 생산하는 데는 막대한 목재(木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기후는 건조(乾燥)한 대지(大地)이기 때문에 한 번 벌채(伐採)되면 재생은 불가능이 되었다. 왜냐하면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산들은 이전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벌채가돼 있었기 때문에 바위 민둥산이 돼 버렸던 것이다.
 
화북(華北)으로부터 몽강(蒙彊)까지의 지경(地境)을 달리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이 민둥산 위에 쌓아 있기 때문에 어디서 보든 멀리까지 보이게 돼 주간에는 이민족(異民族)이 침입(侵入)은 바로 알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동이족(東夷族)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인 예맥(銳麥;濊貊)은 남북(南北)으로 분열(分裂)해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유럽까지 감으로 게르만민족의 대이동(大異動)을 유발(誘發)한 것이었다. 한편 철기(鐵器)가 이용하면서 대륙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해 인구도 인구도 6000만 명이나 증가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해 지나(支那;中國) 역대왕조(歷代王朝)도 서역통치(西域統治) 정책(政策)과 후한시대(後漢時代)의 삼국역사(三國歷史) 및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지나의 위(), (), ()가 발흥(勃興)하기 전후의 당시 상황과 당시 상황을 다 살필 수 는 없으나 그 일부나마 살피고 우리역사연구에 참고 하고자 한다.
 
후한(後漢) 중기(中期) 황건(黃巾)의 난과 중원의 변화
 
예맥(銳麥;濊貊)을 비롯한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중원에서 서역(西域)진출은 이 시대의 서역사정과 서역(西域)의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역은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방의 여러 제국(諸國)과의 무역과 문화교류의 요지(要地)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중원(中原)의 상인들은 도기(陶器), (), 면직물(綿織物) 등을 서방제국(西方諸國)에 수출하게 되고 서방제국은 중근동제국(中近東諸國)의 교역품(交易品)뿐 아니라 머나먼 유럽으로부터의 물산(物産), 미술, 때로는 종교, 학문 등 문물을 중원(中原)에 가져오게 돼 대륙문화의 다양화와 국제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서역의 역사의 각광(脚光)을 받게 된 것은 예맥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의 그 후예인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라(加羅;伽倻)의 선진문화를 흡수한 후에 서역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중원의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이러한 시대도 우리 삼국시대가 끝난 후 당()까지였다. 이 시대도 얼마 안가서 이슬람 상인에 의한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더욱이 유럽제국이 대항해(大航海)시대에 들어가면서 실크로드의 중요성은 점점 저하하여 지나에 있어서 서역제국은 단지 조공(朝貢)을 촉진하고 황제위광(威光)을 국내에 나타내는 영역(領域)에 불과했다.
 
한편 후한(後漢)은 중기(中期) 이후(以後)가 되면서 유약한 황제(皇帝)가 계속 이어져서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이 격렬한 세력싸움이 반복되면서 국가기강(國家紀綱)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는 동안 지방호족(地方豪族)들은 지방의 관직(官職)을 독점한 위에 후한(後漢)에 복속(服屬)되어 있던 이민족(異民族)을 혹사(酷使)하곤 하였다.
 
이 때문에 기마민족인 강족(羌族)의 대반란(大反亂)이 있었다. 또한 물가(物價)의 고등(高騰)과 생활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은 도교(道敎)에 기반을 둔 종교결사(宗敎結社)의 태평도(太平道)에 입신(入信)하는 자가 많아 10여 년 동안에 수십만으로 늘어났다.
 
이에 태평도(太平道)의 교조(敎祖)인 장각(張角(?~184)은 신도(信徒)들을 군대(軍隊)로 조직해 서기 184년 황건(黃巾)을 표식(標識)으로 해서 거병(擧兵)을 하였다. 소위 황건黃巾)의 난()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황건적(黃巾賊)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지나의 동반부(東半部)의 관청과 촌락(村落)을 불태운다든가 약탈(掠奪)을 행하였다. 그러나 서기 18년 말에는 각지(各地)의 주력(主力)은 진압(鎭壓)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황건적(黃巾賊)을 소탕한 조조(曹操(155~220)207년 경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세력으로 위()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후한(後漢)의 삼국시대는 결사(結社)가 나라를 세웠다
 
지나의 전한시대(前漢時代)는 서기전 202~서기 8년까지로 보고 후한(後漢)시대는 서기 25~220년인데 후한(後漢)의 삼국시대는 서기 220~28060년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우리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보듯 유비(劉備;11~223)가 있었고 그는 전한(前漢) 6대 경제(景帝)의 말예(末裔)라 칭하고 학문은 없으나 인망(人望)이 있어서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후에 공명(孔明)이라는 군사(軍師)를 얻는다.
 
유비(劉備)는 양자강 중유역(中流域)의 실권(實權)을 장악해서 촉()을 건국했다. 한편 황건(黃巾)의 난()에 활약(活躍)한 맹장(猛將)인 손견(孫堅)의 아들인 손권(孫權;182~252)은 절갈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화남(華南)에 세력을 장악해 ()’나라를 건국함으로서 위(), (), ()의 삼국정립(三國鼎立) 시대가 이뤄졌다.
 
이러한 나라의 건국은 지나사회를 움직이는 비밀결사(秘密結社)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 사람들의 사회를 볼 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비밀결사(秘密結社)의 존재이다. 이 조직은 막강한 조직이 된다.
 
이 조직은 원래 종교상(宗敎上)의 조직으로서 출발한 것이나 상호부조기능(相互扶助機能)이 강()하고 그 구성원(構成員)이 많아지면 정치적인 파워(power)를 갖게 된다. 때로는 정권(政權)에 대해서 반란(反亂)을 일으켜서 정권을 넘어트리는 일도 있다.
 
그 한 예()가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1328~1398)의 백련교(白蓮敎)이다. 이 결사(結社)의 시작이 태평교(太平敎)였다. 그 외에도 같은 시기(時期)에 같은 도교(道敎)를 기본으로 한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사천(四川)에 나타났다.
 
그 법은 기도(祈禱)에 의한 치병(治病)으로서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 외우고 사례(謝禮)로서 오두(五斗)의 쌀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백련교(白蓮敎)가 일어난 것은 송() ()1133년의 일로서 원대(元代)가 되면 강남지방일대(江南地方一帶)에 널리 퍼져서 원()나라 말기에는 홍건(紅巾)으로 머리를 두룬 동료(同僚)의 표식(標識)으로서 원()을 넘어 트려 버렸다. 주원장(朱元璋)은 이때 크게 활약한 공로로 장군(將軍)이 되고 후에 명 태조가 되어 역사 전면에 나온다.
 
이와 같이 지나에서는 풍요(豊饒)한 사회(社會)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 상호부조(相互扶助)하에 결과를 만들어 서로 도우는 경우가 있다. 당시 정부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위수단(自衛手段)으로서 조직(組織)을 만드는데, 결속(結束)은 견고(堅固)하고 조직의 정한 법을 어긴다든다 탈회(脫會)를 하면 엄한 제제(制裁)를 받았다.
 
또한 때로는 범죄자(犯罪者)를 숨긴다든가 위법행위(違法行爲)를 행한다든가 복지활동(福祉活動)을 한다든가 상업활동(商業活動)을 하는 등 그 실태는 다종다양(多種多樣)했다. 또 화교(華僑)와 같이 해외(海外)에 있는 지나인의 경우는 상호부조의 필요로부터 반드시 비밀결사를 갔고 있었다.
 
, , 전쟁 인명피해 4800만명은 넘을 것
 
서기 25~220년의 후한시대(後漢時代)를 거쳐 서기 220~280년의 삼국시대를 지내에는 대규모의 전란(戰亂)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상자(死傷者)를 내었다. 황건(黃巾)의 난()은 중원의 중반부를 덮는 대규모로서 1회의 회전(會戰)에서 수 만의 황건군(黃巾軍)이 살해되는 일이 때때로 일어났고 항복한 경우에도 용서없이 생매장 되었다.
 
지나의 삼국시대가 되니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에 더해서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사마의(司馬懿仲達;(179~251) 등이 역사적 대스타들이 활약하는데 적벽(赤璧)의 싸움과 오장원(五丈原)의 싸움 등 대회전(大會戰)에서는 양군(兩軍)이 합해서 200만명의 군세(軍勢)가 격돌하여 100만명 단위의 사상자(死傷者)를 낳게 됐다.
 
이로 인해 병력이 부족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農民)을 군역(軍役)에 나가게 되니 농촌인구의 감소는 농작물의 수확이 없어 3국 모두 기근이 연속하게 되었다. 이 때 인구 추이를 보면 후한이 가장 번영한 157년에 인구는 5649만명이었으나 조조가 죽은 220~242년경 지나의 인구는 763만명으로 크게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짧은 기간에 4800만명의 인구가 소멸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전란(戰亂)에 의한 살육(殺戮)과 학살(虐殺)이 반복 되었고 또한 기근과 자연재해가 연속해서 지나(支那;中國)를 엄습했는가를 용이하게 상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후한 말기 국도(國都) 낙양(洛陽)에 들어온 정권을 마음대로 다스린 동탁(蕫卓)은 저()와 강() 등의 이민족(異民族)을 인솔해서 천하를 분열시켰으나 그 부하인 조조(曹操)는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군단의 유용함을 알고 동탁의 사후 새로운 유목기마병을 징발해 오환족(烏桓族)의 근거지인 유성(柳城)을 급습해서 단우(單于)를 위시해서 20만명을 살해하고 오환병(烏桓兵)을 붙잡아 자군(自軍)으로 했다고 한다.
 
()의 조조(曹操)가 하는 방법을 바로 오()와 촉()도 모방(模倣)하게 되어 오()는 산간부(山間部)에 사는 산월(山越)을 이용하고 촉()은 티베트계의 저()나 강족(羌族)을 이용했다. 이러한 위(), (), () 3국의 치열한 전쟁과 기근(饑饉) 때문에 많은 인구가 상실(喪失)했기 때문에 병사(兵士)로서 뿐 아니라 토목공사(土木工事) 등의 노동자(勞動者)나 농가의 소작인도 대량으로 도입하는 필요가 요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나의 왕조(王朝)를 멸망하고 300년 간에 걸친 이민족국가(異民族國家)의 창설(創設)이라는 대혼란시대(大混亂時代)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또 남북조(南北朝)시대를 맞이하는 주요원인(主要原因)이 되었다.
 
이 결과 주목되는 것은 위(), (), () 삼국시대 인구가 700만명까지 감소했다. 이에 지나족을 대신해서 몽강계(蒙疆系), 티베트계, 퉁구스계 남방계(南方系) 등의 이민족(異民族)이 다수 들어와서 한족(漢族)과 동화융합(同化融合)해 새로운 지나족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지나에 한족(漢族)은 없다.
 
(), (), () 전쟁 후 대혼란 시대가 된다
 
(), (), ()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위()의 장군 사마염(司馬炎;서기 26~290)이었다. 사마의(司馬懿仲達;서기 179~251)의 자손인 사마염(司馬炎)은 위()의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해서 265년에 진()을 건국해서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긴다. 그리고 280년에는 오()를 멸하고 전국을 통일(統一)한다.
 
그러나 사마염(司馬炎. 武帝)290년 사망하자 왕실의 분쟁이 발생해 1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제왕(諸王)은 배하(配下)의 병력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동이의 기마족인 예맥(銳麥;濊貊)의 주축을 이루는 흉노(匈奴), (), (), 선비(鮮卑), 흉노의 지족(支族)인 갈() 등 이민족을 많이 포용해서 이용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몽강(蒙疆)의 북방민족(北方民族)인 특히 예맥(銳麥;濊貊)은 그 이전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천 년간 대륙을 정벌(征伐), 정복(征服), 지배(支配)하였기에 진()의 무력을 보지(保持)하는 구릅이 태반(太半)을 점하고 있었다.
 
이 흉노(匈奴), (), (), 선비(鮮卑), 흉노의 지족인 갈(), 지나 인들이 오호(五胡)라고 부르는 부족(部族)들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서, 지나 깊숙이 침입을 시작하여 먼저 진()의 수도(首都)인 낙양을 311년 함락하고 별도의 부대는 장안(長安)316년 함락한다.
 
여기에 지나인들도 합쳐서 서기 304~서기 439년까지 거의 140년 간에 16국가가 흥망(興亡)을 거듭했다. 많을 때는 8개국이 병존하는 모양새였다. 이 시대를 역사(歷史)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 十六國時代)라 부르고 있다.
 
이 화북(華北)의 민족적 혼란을 통일 한 것은 선비(鮮卑)의 한 부족인 척발부족(拓跋部族)이다. 이 척발부족(拓跋部族)은 가장 늦게 내몽골지방에서 일어나서 서기36년에 평성(平城)에 북위(北魏)를 건국한다.
 
북위(北魏)는 외몽골지방에서 세력을 증대시켜 터이키계() 민족 고차(高車)399년에 정복해 화북(華北)지방의 약소국가(弱小國家)를 멸해서 국력을 기른 후 439년 화북(華北)을 통일하고 140년간에 걸친 오호(五胡) 쟁란(爭亂)의 막()을 닫게 했다.
 
이와 동시기에 강남(江南)에서도 군벌(軍閥)의 유유(劉裕)가 동진(東晋)을 넘어트리고 남송(南宋)420년에 세워서 지나는 남북조(南北朝)의 시대로 넘어간다. (以上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93~124, 貝塚茂樹, ‘中國歷史’. 다수(多數)書冊參照하고 本文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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