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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145>

측천무후의 공과(功過)와 당(唐)의 책봉제도에 대해

측천무후가 정치 일선에 나온 배경과 당시 상황을 고찰하며

스카이데일리기자(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2-09 13: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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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당태종
(唐太宗)은 주변 나라들을 모두 평정한 후 당시 대륙의 패자(覇者)인 강대한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한다. 당태종을 맞은 고구려는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양만춘(楊萬春) 장군이 쏜 화살에 눈을 맞나 한 쪽 눈을 잃고 그 후유증으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다시는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649년에 51세로 타계(他界)했다.
 
당태종의 정관(貞觀)의 치()’는 그 이후 제구자(第九子)인 고종(高宗)에 의해 이어지나 체질(體質)이 약했던 고종(高宗)은 정무(政務)의 결재(決裁)를 재색(才色)을 겸비(兼備)한 무후(武后=則天武后)에게 맡긴다. 이에 주요 사항의 결정은 고종의 무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다.
 
무후의 부()인 무사(武士) ()은 산서(山西) 문수현(文水縣)서 목재업(木材業)을 통해 일대(一代)의 부()를 이룬 자이다. 고조(高祖)가 산서(山西)에서 반기(反旗)를 들었을 때 이에 따라서 장안(長安)에 나와서 상서(尙書)까지 출세한 자이다.
 
관중(關中), 혹은 산동(山東), 강남(江南) 문벌가(門閥家)에 속하지 않은 무씨(武氏)의 딸이 14()로서 태종(太宗)의 첩()으로 후궁(後宮)이었다. 태종이 죽자 많은 궁인(宮人)과 함께 사찰(寺刹;니사(尼寺)의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그 절()에서 고종(高宗)의 눈에 띠어 절에서 나오게 돼 황후(皇后)의 위()에 오른 자가 바로 무후이다. 이에 빈혈(貧血)로 인해 일일이 문서(文書)를 볼 수 없게 된 고종(高宗)은 무후에게 결재(決裁)를 대신 하게 했다.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한 무후(武后)는 훌륭히 문서(文書)를 판단(判斷)해 처리(處理)함으로서 고종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무후(武后)의 전제(專制)는 현경년간(顯慶年間;656~660)경에 시작해 664년 이후에는 섭정(攝政)과 같이 정식(正式)으로 정무(政務)를 보게 되어 천후(天后)라고 칭()해져 고종(高宗)과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다.
 
683년 고종(高宗)이 죽자, 무후(武后)는 고종(高宗)과의 사이에 낳은 중종(中宗)을 제위(帝位)로 세웠다가 얼마 안가서 중종(中宗)을 제위(帝位)에서 내리게 하고 690년에 스스로 황위(皇位)라 칭해서 당()을 새로 ()’라는 국호(國號)를 세웠다. 이는 지나(支那;中國) 역사상 최초이고 최후의 유일(唯一)의 여제(女帝)가 출현(出現)한 것이다.
 
무후치세(武后治世) 공죄(功罪)와 당조(唐朝)의 재흥(再興)
 
측천무후 치세(治世)690년부터 아들 중종(中宗)의 황위(皇位)를 다시 위양(委讓)받아서 당왕조(唐王朝)로 바뀔 때까지 15년간에 이른다. 어찌해서 이러한 변칙(變則)의 여제제(女帝制)가 나온 것인가! 의문이 나올 정도이다.
 
당시 지나에서는 북의 선비족(鮮卑族) 토속(土俗)을 받아서인지 많은 호족(豪族)의 가정(家庭)에서는 부인이 가사(家事)를 단속하는 습관이 있어서 당왕조(唐王朝)의 가정도 예외 없이 부인(夫人)의 발언권이 센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 당시 당왕조(唐王朝)를 지지하는 가장 유력한 관중(關中)의 귀족집단(貴族集團)에 대해서 무명(無名)의 무씨(武氏)의 출신인 무후(武后)가 점차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은 진사시험(進士試驗)에 합격한 신흥관료군(新興官僚群)을 자기 쪽으로 해서 대항하여 관중(關中)의 귀족(貴族)들을 타도(打倒)하고 정권(政權)을 확고(確固)하게 장악한다.
 
무후(武后)의 치세(治世)는 구 귀족(貴族)의 지배(支配)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과거출신(科擧出身)인 신 관료(官僚)로 정사(政事)를 지배(支配)에 대신(代身)하는 과도기(過渡期)를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시 측천무후의 정권(政權)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경찰(秘密警察)을 쓰고 밀고(密告)를 장려(獎勵)해서 반대하는 자를 탄압하였다. 그리고 무후는 조금도 용서(容恕)하지 않는 잔혹(殘酷)하기 때문에 여제(女帝)인 측천무후의 통치(統治)는 후세(後世) 유교 역사가(歷史家)에 의해 많은 비난(非難)을 받았다.
 
측천무후는 무씨(武氏)의 일족(一族)이 당()의 이씨(李氏)를 누르고서 조정(朝廷)의 요직(要職)에 오른 때(683) 이씨 일족(李氏) 일족 의 이경업(李敬業) 등이 병()을 일으켜 모반(謀反)했으나 실패로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축출은 실패한다.
 
측천무후가 죽자 705년 중종(中宗)이 다시 제위(帝位)에 오르며 무씨(武氏)의 주왕조(周王朝)라고 말한 것이 소멸되고 이씨(李氏)의 당왕조로 돌아간다.
 
이 당시 당왕조는 우리가 고대(古代)부터 실시(實施)했던 책봉체제(冊封體制)를 써서 한족(漢族)들도 우리 고대국가들이 제후국에 했던 그대로 당왕조에서도 계승(繼承)해서 실시(實施)하였음을 그 구조(構造)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고대(古代) 단군시대와 삼국시대에 볼 수 있는 많은 제후국에 해온 책봉체제를 쓰고 있었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고대 책봉체제는 어떻게 성행(盛行)했나!
 
첫째로 당왕조의 책봉체제 구조(構造)를 보면 우리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대부터 많은 제후국에 해온 대로 당()도 그대로 한족(漢族)이 사는 본토(本土)를 정주(正州)로 하는 것을 대전제(大前提)로 하고 있다.
 
둘째는 황제가 지배하여 다스리는 영역(領域)에서 중앙정부(中央政府)로부터 파견된 도호부(都護府) 감독(監督) ()에 각기 민족들이 자치(自治)를 인정하는 지역(地域)기미주(羈縻州)’로 하고 있다. ()의 경우에도 정주(正州) 이외의 지역을 여섯으로 나눠서 각기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해서 하고 있었다.
 
셋째는 일단 독립한 나라로서 존재하여 그 나라의 군주(君主)가 당왕조(唐王朝)에 조공을 하여 그 지배 하에 우호관계(友好關係)를 구축한 것을 희망(希望)하고 있는 경우에는 황제(皇帝)는 지나의 관작(官爵)을 주어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맺는다.
 
이를 책봉국(冊封國)’ 또는 외번국(外藩國)’이라 불렀다. 우리도 조명관계(朝明關係)는 이 범주(範疇)에 속했다. 이 군신(君臣)관계로 책봉국(冊封國)의 요청이 있으면 지나왕조는 정치문제에 개입하거나 원군을 보내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관계(朝明關係)가 자주성이 없는 치욕의 관계를 우리도 경험했다.
 
넷째는 지나 왕조(王朝)에 사신을 보냄과 동시에 조공(朝貢)만을 요구하는 것을 조공국(朝貢國)’이라 부르고 있다. 지나왕조에 머리를 숙이면 많은 포미(褒美)를 해준다 말해져 각지 수장(首長)은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많이 있었다.
 
이 조공국(朝貢國)의 예()로서는 때 일본과 임읍(林邑), 운남(雲南)지방에 세워진 남초(南詔)등이 있음을 본다.
 
다섯째는 조공국(朝貢國)과 같이 우호관계(友好關係)가 없는 만국(蠻國)’으로서 지나 황제(皇帝)의 위광(威光)에 복종(服從)하지 않은 것은 물론 황제의 군()도 이길 뿐 더러, 지나의 왕조(王朝)를 무시(無視)하며 그 지나 군주(君主)의 자녀(子女)를 시집보내어 인척(姻戚)관계를 맺어 우호관계(友好關係)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이런 나라를 대적국(對敵國)’이라고 불렀다. 예컨대 예맥(銳麥;濊貊), 돌궐(突厥), 토번(吐藩)이 이에 해당한다.
 
여섯째는 대등(對等)의 관계로 사절을 교환하는 것으로서 이를 대등국(對等國)’으로 불렀는데 당시대(唐時代)대식(大食)’이라고 부른 이슬람제국(帝國)이 이에 속한다.
 
일곱째는 절역(絶域)’이라고 불러서 일체 국가간(國家間)의 교섭이 없이 지나(支那;中國)의 황제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지역이다. 물론 이곳은 당시 유럽제국(諸國)을 지칭한 것인데 예맥은 유라시아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
 
()의 이민족 정책(政策)
 
()은 영토가 크게 확대한 제2대 태종시대(太宗時代), 서역(西域)의 경로(經路)를 보호하기 위해서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다. 이 도호부(都護府) 목적(目的)은 기미정책(羈縻政策)에 따른 복속지역(服屬地域)의 제민족(諸民族)의 통치경영(統治經營)외에 위무(慰撫), 경계(警戒), 토벌(討伐)등 을 주 임무(任務)로 하고 있었다.
 
당대(唐代)이 최초로 설치된 것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서주(西州)에서 후()에 구자(龜玆)로 옮겼다. 그 지배 범위는 분지(盆地)와 사막뿐 아니라 투르크메니스탄까지 미쳤으나 787년에 토번(吐藩)이 빼앗아 버렸다.
 
이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단우도호부(單于都護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가 계속해서 설치했는데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제외하면 만리장성(萬里長城)따라서 설치하고 있다.
 
()의 현종대(玄宗代)가 되면 도호부제도(都護府制度)에 대신해서 지원제(志願制)절도사(節度使)’가 속지(屬地)10정도 두어 졌다. ‘절도사(節度使)’ 즉 번진(藩鎭)은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서 파견된 사령관의 의미로서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이자, 동시에 관찰사와 재정의 권한도 겸해서 군정, 민정, 재정의 3권을 장악했다.
 
그 위에 지원제(志願制)이기 때문에 번진(藩鎭)에서는 스스로 다수 병사를 모집했다. 이런 지원병은 용주(雇主)인 절도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군벌(軍閥)이 형성하게 되었다. 예컨대 하북삼진(三鎭;노용(盧龍), 천웅(天雄), 성덕(成德))과 같이 수대에 걸쳐서 절도사를 세습(世襲)한다든가 세부(稅賦)를 중앙(中央)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등 당()의 중앙정부로부터 반은 독립한 군벌(軍閥)이 되는 것이 늘어나게 되었다.
 
번진(藩鎭)의 병수(兵數)1만명~5만명, 많은 경우에는 10만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8세기 말에 번진(藩鎭)의 수는 50개소를 넘고 있었다. 이는 755년부터 9년간 계속된 안녹산(安祿山;(?~757)의 난()은 그가 3개의 절도사를 겸하여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녹산(安祿山)18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안녹산(安祿山)18만의 병력을 가지고 낙양(洛陽), 장안(長安)도 함락해 현종(玄宗)은 사천성(四川省)까지 도망가서 황위(皇位)를 숙종(肅宗)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은 이 난()을 평정해서 변경(邊境)뿐 아니라 정주(正州)내에도 번진(藩鎭)을 두었으나 오히려 반당적(反唐的)인 군벌이 할거하게 되어 결국은 당()은 군벌(軍閥)에 의해서 멸망되고 차시대의 오대십국(五代十國)도 다 번진(藩鎭)이 세운 나라이었다.
 
이 번진(藩鎭)이 폐절(廢絶)된 것은 송()시대가 되어서이다. 원래 한족(漢族) 땅에 없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각지에 군사기지를 설치한 것이 당() 붕괴(崩壞)로 이끌었던 것이 되었다. (以上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貝塚茂樹,‘中國歷史’.70~98. 杉山徹宗,‘眞實中國四千年史145~158面外 많은 書冊參照하고 本文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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