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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放談)

재현회화를 업그레이드시킨 화가, 이석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4-30 10:30:10

 
▲이재언 미술평론가
/한국 극사실회화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가
/연작 ‘일상’ 통해 대상을 다큐영화 같은 앵글로 포착
/기조는 유지하되 서사를 더 중시하는 新낭만적인 화가
/화집 넘기다 보면 눈이 호강 “주옥같다” 말 절로 나와
 
엘리트 계층에서는 현대미술을 ‘동시대적’ (contemporary)이기 보다 ‘근현대’(modern)의 것으로 이해하는 성향이 더 짙다. 특히 ‘모던’은 계몽주의적 자율성에 근거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색깔을 좀 더 짙게 드리우고 있다. 형식주의와 아방가르드가 전체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퇴폐’로 낙인이 찍혀 박해를 받았던 전력은 곧 영광의 훈장으로 바뀌었다. 자유, 자본주의의 승리에 편승해 차지해야 할 전리품이 바로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자면 현대미술은 ‘모더니즘’의 연장선이며, 전통적 아카데미즘이나 리얼리즘의 재현성에 대한 승리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재현의 소외현상과 그에 대한 반발과 저항은 1980, 90년대의 최대 이슈였다. 그 첨예한 갈등 구조 속에서 80년대 색다른 형상미술의 등장이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이퍼리얼리즘’이다. 서구의 팝아트가 아방가르드의 세례 속에 근본주의적 해석과 노골적인 상업성으로 말미암아 거부감을 희석할 필요가 좀 있었을 것이다. 다소 회화성을 윤색한 ‘포스트팝’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이 우리 화단의 젊은 작가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재현적 묘사력 외에는 전위적인 양식들이 정서적으로 호감을 주지 않았다가 묘사력을 살리는 양식이 서구에서 바람을 타면서 우리 젊은 작가들에게는 좋은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한국의 극사실회화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이 이석주(1952년생)이다. 그는 70년대 말부터 붉은 벽돌담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화려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커다란 100호짜리 캔버스에 크게 확대된 벽돌의 정밀한 묘사는 리얼의 극한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화면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때의 강한 임팩트가 그를 극사실주의의 범주에 가둬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80년대 넘어가면서 ‘일상’ 연작이 발표되었다. 도시에서 혹은 일상생활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한 대상들을 다큐 영화처럼 극적인 앵글로 포착하여 화면에 펼치는 작업이다.
 
 
▲ ‘일상’ 연작 [사진=필자제공]
 
이후의 작업들을 보면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우연히 조우한 상황 속에 무언가 이야기를 담으려 하는 상당히 극적인 장면들을 자주 그린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설명보다 독자의 해석을 기다린다. 1982년에 제작된 ‘일상’ 연작 중 하나는 버스 안에서 바깥을 보고 그린 장면이 있다. 원경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은 얼마 안 되고, 화면의 대부분이 앞좌석과 버스 내벽 등의 부분으로서 어둡게 실루엣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이 역시 영화의 어떤 스틸 컷처럼 보이며, 비교적 감정을 배제하고 있지만 어떤 서사성이나 극성이 충분히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선친이 우리나라 초창기 엘리트 연극인 이해랑 선생으로서, 그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화면은 소재나 상황, 앵글 등에서 극적 표현이 상당히 두드러지고 있어 이러한 추측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후 90년대는 같은 ‘일상’ 연작이지만, 무한한 시간을 향해 가는 흐름과도 같은 일상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반영한 작업으로 바뀌고 있다. 이때 시계와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내는 기관차가 시간의 심볼로 등장한다. 이후로는 ‘회상적 여행’, ‘서정적 풍경’ 연작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화면은 기억이나 환영 등을 소환해내는 초현실적 포맷을 2000년대까지 이어간다. 시적인 서정성도 짙지만 에어브러쉬에 의한 부드러움과 감미로운 여운의 화면은 이제 극한의 기계적 재현성을 추구하는 극사실주의와는 확실히 결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도의 재현성만으로 극사실주의라 분류하는 기준이라면, 싱싱한 과일을 상상 초월의 묘사력으로 재현하는 구상회화 작가들이 더 잘 부합될지도 모른다.
 
  
 
▲‘사유적 공간’ 연작
 
이석주 작가의 경우, 기조는 재현이지만 서사를 더 중시하는 신낭만적 화가라 볼 수 있다. 최근까지 작가는 ‘사유적 공간’ 연작에 매진하고 있다. 근작들에서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도 사유와 서사에 더 비중을 두고 있으며, 재현적 묘사력은 도구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근작에서 보면 베르메르 이미지나 렘브란트 이미지들이 인용되고 있다. 오마주의 의미도 있겠고, 또한 고전의 거장들과의 대화도 담고자 하는 문맥이 읽힌다. 과거의 거장들과 작가가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아마도 “선생께서는 오늘의 미술, 그리고 나의 그림을 어떻게 보십니까?”라 하지 않을까.
 
▲ ‘벽’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 그의 화면에서 몇 사람의 예술혼이 혼재함을 감지할 수 있다. 무슨 영향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이해를 위한 틀 혹은 직관적으로 전해지는 특성이나 유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들뜨지 않고 담담하고 부드럽게 화면을 전개하면서 화두를 던지는 모습은 르네 마그리트, 빛과 극적인 서사가 감지되는 대목에서는 베르메르, 넓은 들판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직한 톤의 시낭송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앤드류 와이어스 등이 느껴진다.
 
▲ 이석주 작가
  
우리 나이로 벌써 70이 된 작가가 지금도 재현에 충실하다는 것은 달리 말해 특정 신체 부위의 혹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의 손을 빌리기도 하는 것이 화단의 관행이라는데,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미술이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탄탄하게 쌓아 올린 이런 작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의 화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눈이 호강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작품들의 경지가 “주옥같다”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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