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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202>

지나 삼황오제도 모두 우리선조들이다

지나의 기원과 형성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5-08 15:18:55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는 자기들의 시조를 처음 헌원(軒轅)이라 주장하고 치우제와 신농도 자기들 시조라 한다. 과연 이들의 그들의 시조인가.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헌원으로부터 요순시대(堯舜時代)를 거쳐서 하(夏), 은(殷), 주(周)로 이어진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그들 역사를 배달국 시대로 상승시키려는 허구의 조작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필자가 2016년 8월1일~7일까지 고구려 천리장성, 비사성, 의무려산, 부여족 무덤터-공룡박물관 조양박물관, 우하량 적봉시, 적봉박물관 홍산공원 파림좌기 박물관 단군제단 등 답사를 하면서 우리 역사가 지나 역사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지나에 답사 가서 지나 화하족(華夏族)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 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나 역사는 하우(夏禹)가 시조가 아니라 신농(神農) 염제(炎帝)와 헌원황제(軒轅黃帝)의 자손이라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탁록지구(涿鹿地區)에 삼조당(三祖堂)이라는 거대한 사당을 지어 놓고 염제(炎帝)와 헌원과 73회나 싸워 이긴 치우제(蚩尤帝)까지 소상(塑像)을 모셔놓고 화하족(華夏族) 조상으로 삼조(三祖)라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 역사가 얼마나 취약했으면 이런 역사 위조를 하고 있을 지 말해주는 것이다. 지나의 삼황오제는 3명의 황(皇)과 5명의 제(帝)등 8명을 말하는데 사서마다 각각 지칭하는 것이 차이가 있어 정사가 없다. 지나가 말하는 삼황오제는 조작된 것이었다. 
 
1370년경 원(元)의 증선지가 지은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따르면 삼황(三皇)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등 3명을 말하고, 또 황왕대기(皇王大紀)에 따르면 오제(五帝)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등 5명 외에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순(帝舜)을 이르기도 하는데 제각각 제멋대로이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염제(炎帝)와 헌원(軒轅) 황제(黃帝) 등은 모두가 지나의 조상이 아니라 순수한 우리의 조상인데도 지나는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오늘은 이들이 한족(漢族)의 조상이 아니라 우리나라 배달조선의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임을 바로 밝히고자 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도 우리 조상이지 지나조상 아니다
 
태호복희(太昊伏羲)는 삼황오제의 으뜸으로 위치하고 있는 인물로 백성들에게 목축과 수렵 등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고 ‘음향오행설’을 창안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고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 인문의 시조로 받는 조상이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서기전 3897년 10월3일 환웅(桓雄)의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이를 신시(神市)라 했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성(三聖記) 등에 말하고 있다. 
 
환웅(桓雄)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농사와 명(命)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 360여일을 살펴서 세상을 교화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했는데 환웅 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해 태우의(太虞儀)가 즉위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12명 있었는데 장남이 다의발(多儀發) 환웅(桓雄)이고 막내가 태호(太昊)라 했는데 그가 바로 복희(伏羲)인 것이다. 이 복희는 신시(神市)에서 출생해 우사(雨師)직을 물려받았고 후에 청구(靑邱), 낙랑(樂浪)을 다스렸고 또 진(陳)으로 이주해 불(火)사용법을 전수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복희는 나무로 집을 짓는 법도 전수한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西土)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태백일사 제3신시본기에 말하고 있다. 또한 복희는 우주의 변화를 관찰해 쾌도(卦圖)를 제작했고 신시 계해년을 고쳐 첫 갑자년으로 했다. 
 
복희가 세상을 떠나자 여왜(女媧)가 뒤를 이어 주양(朱襄)을 다스리고 문자(文字)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전했다. 그리고 복희의 무덤도 산동(山東)의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남쪽에 있다. 
 
한편 신농(神農)은 어려서부터 온갖 풀을 맛보고 약(藥)을 만들고 성장해서는 열산(列山)으로 이주해 나라를 세우고 기산(淇山)의 양지(陽地)에 백가지 곡식과 백가지 채소를 심고 오곡을 심으니 9주의 백성들이 곡식을 알기 시작했다.
 
이로써 당시 천하의 사람들이 다 곡식을 따라서 먹게 됐음으로 백성들이 정착해 생업에 종사하게 되니 마을을 이루고 교역을 하게 되어 사람들이 곡식, 의복, 약재, 석공기술 역시 그 기틀이 마련됐다고 하고 있다.   
 
신농의 출신성분을 보면, 그는 제8대 안부련환웅(서기전 3240~서기전3167년)의 신하인 소전(少典)의 아들로 원래 웅씨(熊氏)의 분파로 환웅의 명을 받아 강수(姜水)에서 병력을 감독하는 인물로 서기전 32세기의 사람이다. 
 
소전은 고시씨(高矢氏)의 방계(傍系)중 하나인데, 이 방계중에는 소전과 소호(少皞)가 있었는데 소전의 아들이 바로 신농(神農)인 것이다. 고시씨(高矢氏)는 신지(神誌) 혁덕(赫德)과 함께 서기전 39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배달국의 제1대 거발환(居發桓;서기전3897년~서기전 3804년)의 천황(天黃)의 신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복희와 신농 등은 결코 지나의 조상이 아니고 우리의 조상인데도 지나는 자기들의 조상으로 도용해서 역사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정희철 [중국은 없다.] 84면~125면을 참조하고 본문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지나의 천자(天子)제도 우리 선조들이 창조했다
 
지나는 화하족이라 하는가 하면 하우(夏禹)가 시조라 하다가 이도 아니고 탁록지구(涿鹿地區)에 삼조당(三祖堂)이라는 거대한 사당(祠堂)을 지어놓고 거기에 안치한 삼황은 배달국의 제14대 황제인 치우제(蚩尤帝)와 화하족(華夏族)의 수장(首長)이라고 말한 헌원제(軒轅帝) 및 신농염제(神農炎帝)를 말하고 있으나 모두 우리의 선조들이다. 
 
오래전 이미 밝힌바 있는데 인류사상에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제창한 것도 오직 우리뿐으로 지나에는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이 없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나의 문헌에도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論語 卷之, 八佾日第三). 
 
논어(論語)에 ‘이적(夷狄)은 군주가 있고 지나는 군주가 없다’고 했다. 이는 지나에는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28세의 청년으로서 담자(郯子)를 찾아가 천자(天子)의 관제를 배웠다고 했는데 또 관제나 예(禮)를 잃으면 이적(夷狄)에게 배운다고 한 것이다. 지나는 우리를 이적(夷狄)이라 칭했던 것이다. 
 
지나의 유명한 사가(史家) 범엽(范曄)은 공자(孔子)의 말을 후한서 동이전에 기입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공자의 말을 조선조(朝鮮條)에 기입했는데 담자(郯子) 또한 우리 한민족이고 천자(天子)라는 명칭도 우리가 창조한 것이다. 
 
또한 포박자(抱朴子)에 지나족의 시조라 칭하는 신화적인 제왕(帝王)인 황제(黃帝)가 동(東)으로 청구(靑丘)에 와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었다고 했다. 여기서 청구는 우리 조선이고 삼황(三皇)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 역사의 첫 머리에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라고 기록한 것은 우리 한국에서 수입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베낀 것이다. 이 신화도 천자(天子), 천황(天皇)등 황제(黃帝)의 문물제도를 최초에 창조한 자가 우리 한민족(韓民族)으로, 지나는 우리가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이다. 
 
고기(古記)에 천신환인(天神桓因)이 조선 땅을 중심으로 인류를 지도한다고 했다. 단군도 천신의 피를 받았다고 했다. 인류의 대표라 칭하는 천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증언하고 천신의 피를 받았다고 칭하는 천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증언한 것은 단군이 실재한 정확한 기록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물제도를 후대에 와서 거란(契丹)과 일본이 천황(天皇)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의 천자제도를 흉내 낸 것으로 그 본원을 따지면 우리의 문물제도의 사상을 모방한 것이다. (이상은 최인 [韓國學講義 47面 51面 參照 引用했음).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 波夫)교수는 임나(任那)가 일본 민족의 발상지라고 주장했는데 임나는 반도가 아니다. 대륙의 백제와 사로신라 사이에 있었던 것이 임나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卷二) 가락국기(駕洛國記)에 황천(皇天), 상제(上帝), 황후(皇后), 삼황(三皇)등 문구가 많은데 일본이 천황을 칭한 것은 한국사상을 직수입한 것이다. 
 
글을 맺으며
 
지나는 우리의 역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라이다. 상고사도 없고 고대사도 다 위조해서 마치 자기들이 대륙의 주인인양 행세하려고 하면서 삼황을 거론하고 오제를 논하나 삼황오제 모두가 우리의 선조이지 지나가 말하는 그들의 시조가 아닌 것이다. 
 
헌원은 동이족이면서도 그 부인을 그들이 말하는 화하족(華夏族)의 여자와 결혼해 지나족 수장(首長)이 되어 치우황제와 73회나 싸웠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헌원을 설명하며 치우와 탁록(涿鹿)에서 싸워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말하는데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만고의 영웅으로 패한 적이 한번도 없는 천황(天黃)임은 세상이 다 안다.
 
그런데 사마천은 지나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며 치우천황을 잡아 죽였다고 하고 또 사기(史記)에 헌원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하나 이것은 모두가 허구로 사기(史記)가 소설같은 이야기로 꾸며지고 있어 믿을 수 없는 위서(僞書)가 되고 있다. 
 
예컨대 헌원이 소전의 아들이라면 황제헌원과 신농은 형제가 된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신농은 서기전 32세기 사람이고 헌원은 서기전 27세기의 사람이다. 그러니 서기전 27세기의 헌원이 서기전 32세기의 인물인 염제(炎帝)와 싸워 승리해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는 것은 모두 허구인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은 헌원이 시간을 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염제(炎帝)와 싸워 이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은 위사(僞史)로서 이를 사서(史書)로 받아들이는 자는 사학자가 아님을 눈여겨 봐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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