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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의 음양오행 경제

신(神)과 수학, 자연운명학에 대하여(II)

절대자·신(神)은 정의 내릴 수 없는 파이(π) 같은 존재

신앙이란 결국 삶의 폭압(暴壓)을 견디게 하는 그 무엇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10-26 09:43:07

 
▲김태규 명리학자·칼럼니스트
원을 다각형으로 바꾸어서 측정해보려던 시도
 
인간들은 변이 없는 원의 넓이를 제대로 측정해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다각형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다각형의 넓이를 측정하는 기술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든가 “유클리드의 원론”이 나오면서 많이 발전했으니 말이다.
 
기원 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한 이론가는 정다각형에 있어 변의 수를 지속적으로 늘려 가면 결국엔 원이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어떻게 해서든 원을 다각형으로 만들어서 측정해보려는 시도였다. 람누스의 안티폰(기원전 480-411년경)이 그랬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기원전에 만들어진 중국의 백과사전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원은 모서리가 9999개, 즉 9999각형이란 글이 보인다. 사실 이는 무한 정다각형의 개념이다.
 
앞의 안티폰의 주장은 15세기 독일의 신학자 니콜라우스에 의해 다각형은 제 아무리 변의 수를 늘려도 원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으로 반박을 당했다. 그 반박은 실로 옳다. 다각형이 원이 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게 별로 영양가가 없다.
 
집요한 천재, 아르키메데스
 
기원전 3세기의 한 천재는 앞의 생각, 원을 다각형으로 만들어서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과 사실상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고 그를 철저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그는 앞글에서 소개한 파이(π), 보통은 3.14로 외우지만 실은 무한소수이자 무리수인 원주율 3.141592653589...을 계산해냈다.
 
그는 바로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식민도시인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다.
 
아르키메데스는 정말이지 집요한 천재였다. 그가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아, 그렇구나! 하고 외쳤다는 얘기, 바로 ‘유레카(Eureka)’의 설이 바로 그렇다. (유레카란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서 ‘나는 그걸 찾았어!’ 라는 뜻이다.)
 
원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은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하는 것이고 원주의 길이, 즉 원의 둘레는 원주율 파이에 지름의 길이를 곱하면 된다. 따라서 결국 원주율을 알아야만 가능해진다는 얘기인데 그게 엄청 어려웠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원주율을 구한 방식은 이렇다.
 
미적분학의 원조는 아르키메데스였다
 
원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계속해서 잘게 부채꼴로 쪼갠다. 아르키메데스는 원을 무려 96개의 부채꼴로 쪼갰다. 부채꼴이란 두 개의 반지름과 하나의 호(弧, arc)로 둘러싸인 영역을 말한다. 하지만 워낙 잘게 쪼개다 보니 둥근 호가 거의 직선에 가까워져서 삼각형의 한 변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근사한 값, 근사치를 구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96 정다각형을 만들었는데 다각형의 넓이는 어렵긴 해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하면 구할 수 있다. 다만 무진장 번거롭고 복잡하다.
 
그러나 무진장 끈질긴 집념의 사나이 아르키메데스는 여기에 더해서 원에 內接(내접)하는 96 정다각형과 外接(외접)하는 96 정다각형을 사용해서 원주율 파이의 값이 3+10/71 보다는 크고 3+10/70 보다는 작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를 소수로 바꿔보면 원주율이 3.140845...보다는 크고 3.142857... 보다는 작다는 것을 계산해낸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끝내 원주율의 소수점 아래 마지막 자리까지 찾아내진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 그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자리의 숫자가 영원히 이어지는 무한소수이자 분수(分數)로도 표기할 수 없는 무리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르키메데스가 사용한 방식이야말로 훗날 아이작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미적분학의 시작이었다. 정답을 찾을 순 없어도 극도의 근사치(近似値)를 알아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미분(微分)이란 문자 그대로 극한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쪼개는 방법이고 다시 그걸 몽땅 합치는 방법이 적분(積分)이란 점에서 미적분학의 원조는 기원전 사람인 아르키메데스였던 것이다.
 
좀 더 얘기하면 미분에서 무수히 쪼깰 때 다루는 개념이 바로 극한(極限, limit)이다. 극한이란 어떤 변수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해진 값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무한히 다가설 때의 값이다. 따라서 어떤 정해진 값에 무한히 가까운 근사치(近似値)인 것이다.
 
파이(π)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미묘하고도 결정적인 변화
 
아르키메데스가 알아낸 원주율의 근사치를 예전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 상수(Archimedes' constant)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706년에 이르러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는 파이(π)라 부르기 시작했다.
 
파이(π), 이것은 소수점 아래 무한히 이어지는 무한소수이자 무리수인 원주율에 대한 호칭이다. 그것을 숫자로는 도저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냥 파이(π)라고 부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미묘한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이제 수학에 대한 골치 아픈 이야기는 이것으로서 끝이다.)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걸 결코 정의할 순 없기에 우리가 그냥 파이(π)라고 부르듯이 어쩌면 지고(至高)의 신(神) 또는 절대자(絶對者) 역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고의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회의하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들은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가끔은 상정해보고 있지 않은가. 신앙을 가졌다 해도 절대자 또는 지고의 신(神)이 어떤 존재인지 사람과 비슷한 것인지 아니면 물건인지 심지어는 과연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절대자 지고의 신은 그 자체로서 불가지(不可知)한 그 무엇이다. 확정할 수 없는 원주율을 그냥 파이(π)라고 부르고 있듯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신앙하는 지고의 존재 또한 그런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 본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인지 사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당신을 부르고 싶은 마음에서 달리 뭐라 형언할 수 없기에 그냥 당신을 절대자 또는 지고의 신 혹은 하느님이라 부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영적인 능력이 크거나 신앙이 깊어서 하느님과 통신할 수 있고 하느님 또는 절대자의 마음과 생각,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순간 그건 망상이고 잘못된 신앙이 된다고 본다.
 
우리가 원주율 파이의 값을 확정할 수 없는 것처럼 절대자의 존재와 의지가 무엇인지 우린 알아낼 수가 없다. 그건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한 때 서양 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다만 그랬을 뿐 명쾌하게 증명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원주율의 값을 결코 확정지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알 순 없지만 있다고 믿으면서 절대자의 가호를 바라고 감사하고 의지하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라 본다. 그러니 감히 절대자 또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려고 한다거나 또는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건 이미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게 된다는 얘기이다.
 
절대자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존재가 어떤 방식이고 형식이며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신앙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은 미분의 극한값 또는 근사치 정도라고 여긴다.
 
따라서 신앙이란 절대자를 향하여 무한히 다가가는 노력이자 발걸음이라 하겠다. 마치 미분에 있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해진 값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의 근사치를 말하는 극한(limit)과도 같다.
 
그렇다면 절대자 또는 하느님의 뜻은 절대 알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는데 그에 대한 나 호호당의 답변은 이렇다.
 
그건 사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령 신앙을 가진 당신이 어떤 곳을 가고자 했고 또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그곳에 가지 못했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구나 하고 받아들이란 얘기이다. 이에 다시 아니 왜, 제가 그곳으로 가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을 일이 아니다. 그 역시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질문하기 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그 순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이다.
 
절대자 혹은 지고의 신 또는 하느님 심지어 부처님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그저 신앙이란 그 존재가 나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엔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해줄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라 여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좋은 곳이 있을 것이다, 나는 현재 나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고자 하지만 그게 사실은 아닐 수도 있을 거야, 가다 보면 ‘우연’으로 위장된 필연의 인도를 통해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않았던 그리고 내게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해줄 거야, 이런 생각과 믿음이다.
 
신앙의 효용이란 결국 그것을 가진 자에게 삶의 거칠고 무거운 압력, 폭압(暴壓)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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