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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250>

진(秦)나라도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다

진(秦)이 6국 통합으로 춘추전국시대 끝내다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4-23 10:50:47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진(秦)은 전국시대(戰國時代;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 소위 칠웅(七雄)인 진(秦), 한(韓), 위(魏), 연(燕), 제(齊), 초(楚), 조(趙) 중의 하나로 지금의 서안(西安)에 있는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일어난 나라다.
 
진왕(政)은 서기전 221년에 제를 멸하여 춘추 이래의 난세를 통일했다고 하며 스스로 황제(皇帝)라 했다고 하나 황제 칭호는 그의 사후 내려진 시호(諡號)인 것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조작된 사서(史書)들은 진왕이 황제 발포(發布) 후 13개월 만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도 허구다. 진왕 정(政)에 황제라는 칭호는 그가 창해역사(昌海力士) 여홍성(黎洪星)에게 죽임을 당한 다음에 추서된 것이다.
 
그리고 진왕은 지나인(支那人)이 아니다. 그도 서이족(西夷族)으로 동이민족인 흉노계열의 사람인 것이다. 이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진왕에 대해서도 조작과 왜곡이 여전함은 역사 연구를 하지 않음에서다.
 
한(漢)나라 때 사마천(司馬遷;서기전 145~91년)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 왕실은 은(殷)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의 신하 여수(女脩)가 있었는데 그 후손 중에 오래(惡來)의 후손인 조보가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제5대 목왕(穆王;서기전 977년~서기전 922년)으로부터 조씨 성을 하사 받았다가 그 후 비자(非子)가 제8대 효왕(孝王)의 총애를 받아 영(贏)씨 성(姓)과 함께 진(秦)이라는 지역에 봉토(封土)를 받았다.
 
그리고 그 후손 중에 진시황(秦始皇)으로 알려진 영정(贏政)이 나타나서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여 이때부터 진(秦) 위명(威名)이 널리 퍼져 지나(China)란 국호(國號)가 널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대륙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하여 겨우 서기전 221년~서기전 206년의 15년간이다.
 
오늘은 진나라를 세운 진왕인 정(政)이 동이족인 것과 진의 흥망성쇠가 어떠하였으며 그가 채택한 정책과 제도 등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진왕의 특기할 정책과 망국으로 간 정책
 
진왕은 봉건제도를 폐하고 새로운 관료제도를 채용해서 군현제(郡縣制)를 두어 중앙으로 부터 역원(役員)을 임명해서 파견했다.
 
그리고 그가 채용한 정책 중에서 특기할 것은 지금까지 나라마다 다른 문자의 자체(字体), 차륜(車輪)의 폭, 도량형, 화폐 등의 제도를 통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진왕의 무리한 정책과 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진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마다 있던 6국의 성벽을 파괴하고 병기(兵器)를 몰수한 위에 전국의 부호(富豪) 12만호를 진의 도시에 이주시켜 장려(壯麗)한 궁전과 기타 토목공사를 일으켜 제국은 급속히 기울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사업은 문자통일이었다. 이미 전국시대부터 다른 서체(書体)가 사용되고 있었기에 각국의 왕은 유교의 도배(徒輩)를 고용해서 외교문서 등 작성 또는 사자(使者)로 세우고 있었다.
 
여기서 진왕은 서체나 읽는 것을 통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자(漢字)의 수를 3300자로 결정했다. 또 지금까지 마음대로 한자를 사용해서 만든 각종 서적을 일거에 파기하게 해 버렸다.
 
이를 세상에서는 분서(焚書)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산(驪山) 기슭에 자신을 위한 지하궁전과 같은 육묘(陸墓)의 조영(造營)을 시작하여 전국으로부터 70만명을 징용하여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다. 이로 인하여 중앙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욱이 공사가 끝나면 묘내(墓內)의 진귀한 재보(財寶)의 도굴 방지(盜掘防止)를 위해 일을 마친 일꾼 전원을 육묘(陸墓) 내에 매몰시켜 죽이는 것이었다.
 
또 수도 함양(咸陽)의 궁전도 장려한 것을 건설하였는데 치세 말기에는 함양의 대안(對岸)에 새로운 궁전인 아방궁(阿房宮) 건설을 35만명을 동원해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토목 공사에 종사하는 인원 조달은 진왕이 구축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관료제, 엄격한 법치주의에서 가능했다.
 
즉, 진왕의 관료는 황제가 70만명을 징발하라면 경미한 법률 위반자로 충당하면 그만이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임금을 지불할 필요도 없고,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이로 인해 민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멸망을 면(免)치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以上은 [중국은 없다], 136面~138面과,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80面~88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진의 역사도 왜곡한 조작된 역사이다
 
지나는 제후난립(諸侯亂立)의 전국시대를 제압해서 800년 만에 대륙을 통일한 것 같이 역사를 꾸몄으나 이도 과장된 기록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벌한 역사기록이 서전(書傳) 무성편(武成篇)인데 거기에 화하만맥(華夏蠻貊)이라 하였다. 즉 안으로 지나, 밖으로 예맥조선(銳麥朝鮮;濊貊朝鮮)이라 기록한 것이다.
 
당시 부족 중 주체는 예맥조선이었다. 이미 다 밝힌 것인데 예맥조선이 동주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1000여년 동안 대륙을 정벌, 정복하여 지배한 것이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동이전 등에 명기(明記)되어 있다.
 
조착(晁錯)이 한문제(漢文帝)에게 글을 올려 가로되 진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한 것은 국경을 방위하고 민중이 죽는 것을 구출할 것이 아니고, 넓은 국토를 얻으려는 탐욕을 위한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고 하였다(資治通監卷十五, 漢紀七, 太宗孝文皇帝下).
 
그리고 지나의 재래 사가(史家)와 일본의 사가 중에도 진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하였다고 하나, 이는 선전일 뿐이고 실제로 진을 타도한 자는 예맥과 남월임을 말하고 있다(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62面~81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
 
한편, 진왕은 산동반도 낭사산(琅邪山)에 올라갔을 때 서복(徐福)이라는 남자가 찾아와서 진왕에게 불로장수(不老長壽)의 약(藥)이 동방해상의 봉래국(蓬萊國)에 있는데 그곳은 신(神)이 사는 나라이기에 거기에 가려면, 동남동여(童男童女)를 바칠 필요가 있다, 혹시 저에게 5000명의 동남동여와 배를 주시면 반드시 약초(藥草)를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이도 허구다.
 
서복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갔다는 봉래국은 지금의 일본이라 하나 아니다. 일본은 서복이 일본에 왔다고 해서 서복 묘와 신사(神社)까지 짓고 지금도 제사하고 있으나 모두 허구이고 조작이다.
 
글을 맺으며 - 생전에 황제라 쓴 적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서복이 출범한 후 어떻게 되었다고 기록하지도 않았다. 물론 불로불사(不老不死) 약초를 지참했다고도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서복이 간 곳은 봉래국이 아니라 타이완 남쪽에 있는 저우산도주(舟山島)로 거제도(巨濟島)의 1.4배가 되는 섬이다(독사방요기요 권92).
 
또한 진나라는 만리장성(萬里長城) 25구간 공사를 하다가 망한 나라이다. 현대의 기술로도 50년이나 걸릴 공사를 무리하게 하다가 망한 나라이며 진왕이 진시황(秦始皇)이라 발포 후 13개월 만에 죽었다는 것도 허구이다.
 
진왕이 서기전 210년 역사(昌海力士) 여홍성(黎洪星)에게 시해(弑害)를 당한 후, 간사한 환관(宦官) 조고(趙高)는 진왕의 적장자(嫡長子)인 장자(長子)를 죽이고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즉위시킨다.
 
그 후 진왕에게 황제라는 칭호로 호칭하나 이는 사후에 추서(追敍)한 것으로서 그가 시황제(始皇帝)라고 하는 것도 근거가 없는 허구로 꾸민 것이다. ‘시황제’라고 하는 것은 생전에 쓴 적이 없다.
 
진의 패망도 환관 조고 등이 국정을 농단하며 막대한 재원과 인력(人力)을 조달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조세를 과하고 병역의무가 면제된 사람들까지 징발하여 죽을 때까지 부역을 시킴으로 각 곳에서 민란이 일어남으로 중앙정부는 여러 기능이 마비되고 통제력을 잃게 되어 진나라는 패망하게 된다.
 
국가와 백성을 돌보지 않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를 망하게 한 진왕은 스스로 처음 황제라 하나 아니다. 우리는 상고시대 황제제도를 썼고, 지나는 고대 우리가 전한 것을 바로 잡아야만 역사가 제대로 되는 것이다.
 
지나와 일본의 황제제도도 우리 문물제도를 배운 것이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시행해온 제도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진나라 이전의 황제다. 육국(六國)을 통일한 진왕은 그 해 승상(丞相) 어사(御使)에 하명(下命)하여 천하통일의 공업(功業)에 알맞는 위호(位號)의 찬정(撰定)을 명하였던 것이었다.
 
<參考文獻>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정희철, [중국은 없다]. 우실하, ‘동북공정 넘어[요하문명론], 반재원, [鴻史桓殷]. [단군과 교웅],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智勝, [우리上古史]. 이명우, 최현호[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 [世界を変えた 戰爭, 革命, 反亂].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張金奎, [匈奴帝國].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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