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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고구려 복속을 선택한 내물왕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가 직접적인 계기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5-01 17:57:28

 
▲ 정재수 역사 작가
「삼국사기」를 보면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기록이 있다. ‘37년(서기 392년)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그런데 기록이 다소 어색하다. 실성을 고구려에 보낸 사유를 고구려의 강성(强盛)으로 표현한다. 강성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기실 이런 표현은 사실적 기록이라기보다 해석적 기록에 가깝다. 실성을 볼모로 보낸 배경을 고구려의 강성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삼국사기」는 강성의 실체가 불명확한 다소 애매한 기록을 남겼을까?
 
고구려 강성의 실체 의문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렇다. 내물왕이 실성을 볼모로 보내기 한 해 전인 391년 정월에 우리 역사 최고 정복군주 광개토왕이 등극한다. 광개토왕은 곧바로 백제에 대한 압박 강도를 강화하는 군사적 작업에 돌입한다. 7월에 석현성 등 백제 북쪽지역의 10개 성을 공취(攻取)하고, 이어 10월에 관미성도 공취한다. 관미성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금의 파주 오두산성으로 백제의 해상 관문이다. 백제는 관미성의 손실로 사실상 해상 진출로가 봉쇄된다. 이 충격으로 백제 진사왕은 11월에 구원행궁(김포)에서 급사한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 강도를 고구려 강성의 실체로 볼 수 있을까? 물론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고구려의 강성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사건의 본질은 ‘고구려 복속’이다. 다시 말해 신라는 백제가 광개토왕에게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고 고구려 복속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딘가 부족한 해석이다. 결국 ‘고구려 강성’의 표현은 내물왕이 실성을 볼모로 보내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다.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재해석
 
내물왕이 ‘고구려 복속’을 선택한 이유가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에 나온다. 「신묘년(391년) 기사」는 광개토왕의 ‘병신년(396년) 왜잔국 정벌’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백잔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고구려의 속민(屬民)인 백잔(백제), ▨▨, 신라를 왜가 신묘년(391년)에 나타나 이들을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특히 「신묘년 기사」중 ‘바다를 건너와 파하다’는 한자 ‘도해파(渡海破)’는 일본의 비문 조작이 가장 의심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백번 양보하여 일본이 만든 ‘쌍구가묵본’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도해파’는 다른 해석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건너다’의 뜻을 가진 한자는 ‘제(濟)’와 ‘도(渡)’가 있다. ‘제(濟)’는 큰물(바다)을 건널 때 사용하며(濟海), ‘도(渡)’는 작은물(강·하천)을 건널 때 사용한다(渡江/渡河). 따라서 한자의 용례로 본다면 ‘도해(渡海)’는 ‘제해(濟海)’ 이거나 ‘도강(渡江)’ 또는 ‘도하(渡河)’이어야 한다. 설사 일본이 판독한 ‘도해(渡海)’가 맞다하더라도 해석만큼은 달리해야 한다. 도해는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바다 연안(해안)을 따라 건넌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묘년 기사」를 배경으로 한 ‘병신년 왜잔국 정벌’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광개토왕은 한반도 서남부지방 남정(南征)을 통해 백잔(백제) 18성과 왜잔국 40성 등 총 58성 600촌을 공취한다. 백잔 18성은 남정 이전에 선(首)공취한 성이며, 왜잔국 40성은 남정을 통해 후공취한 성이다. 이들 왜잔국 40성은 주로 충청도 일원에 소재한다. 따라서 당시 왜잔국은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 서남부 지방에 위치했다. 
     
▲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와 ‘병신년 왜잔국 정벌’
     
한반도 왜잔국은 대륙 요서지방의 서부여 대방세력(하북성 노룡현)이 원류이다. 이들은 서기 4세기 전반(316년 추정) 고구려의 압박이 강화되자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했다. 스스로를 ‘백제(百濟·백가제해의 줄임말)’라 칭하였기에 ‘부여백제(夫餘百濟)’이다. 부여백제는 거발성(충남 공주)을 수도로 삼아 한반도 서남부지방 전체로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국을 신민화(예속)하는 ‘신묘년 사건’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부여백제 는 고구려의 정벌 대상으로 규정되며, 광개토왕은 ‘병신년 왜잔국 정벌’을 단행해 부여백제의 본거지인 충청도 40성을 공취했다.
 
이 여파로 부여백제는 한반도에서 퇴출됐다. 당시 광개토왕에게 깨진 부여백제 여휘(餘暉)왕은 한반도를 급히 떠나 일본열도로 망명해, 이듬해인 397년 야마토(大倭) 응신(應神)왕으로 재탄생했다. 그래서 <광개토왕릉비>는 부여백제를 ‘왜잔국‘으로 표기한다.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진 414년에는 이미 한반도의 부여백제(왜잔국)가 일본열도의 왜(야마토)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선택한 신라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사략」(남당필사본)에도 나온다. <고국양대제기>이다. ‘8년(391년) 신묘 4월, 이때 왜가 가야, 신라에 침입하고 백제의 남쪽에 이르렀다(八年 辛卯 四月 時倭侵加羅至南濟).’ 왜(부여백제)가 침(侵)한 대상은 가야, 신라, 백제 등 3개이다. 다만 <국강호태왕기>는 이들 나라를 백잔(百殘), 임나(任那), 신라(新羅)로 적는다(南有百殘任那新羅). 가야는 임나를 말하며 <광개토왕릉비> 비문의 ‘백잔, ▨▨, 신라’ 중 결자 ‘▨▨’는 바로 ‘임나’이다. 특히 「고구려사략」은 왜의 행위를 ‘파(破)’가 아닌 ‘침(侵)’으로 표기한다. 그냥 침략하는 정도이다.
 
「신묘년 기사」는 내물왕이 ‘고구려 복속’을 선택한 직접적인 이유다. 내물왕은 신묘년(391년) 부여백제(왜잔국)의 침략을 받아 예속(신민)되자, 이듬해인 392년 서둘러 실성을 광개토왕에게 볼모로 보내며 고구려 복속(속민)을 선택한다. 내물왕은 부여백제에서 고구려로 말을 갈아탄다.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며 내세운 ‘고구려 강성’은 신묘년 사건이 계기가 된 ‘고구려 복속’을 에둘러 표현한 명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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