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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경주 인왕동고분군의 전(傳) 내물왕릉

실제 내물왕릉, 인왕동고분군 118호분이 유력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5-26 18:01:04

▲ 정재수 역사 작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왕은 서기 402년 2월, 53세(350년 출생)로 사망한다. 사망 사유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사망 8개월 전인 401년 7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10년 만에 귀국했다. 이는 실성의 환국과 내물왕의 죽음 사이에 어떤 인과성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특히 실성은 392년 내물왕이 ‘고구려 복속’을 선택하면서 광개토왕에게 볼모로 보내진 까닭에 내물왕에 대한 실성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다.
 
「신라사초」 기록의 내물왕 죽음
 
「신라사초」는 내물왕의 죽음을 병사(病死)로 기록한다. <내물대성신제기> 기록이다. ‘수호(임인·402년) 2월, 제(내물왕)의 병이 극심해져 신산(神山)에서 약을 구했다. 제가 말하길 “천명은 스스로 존재하거늘 약의 효능으로 어찌 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했다(水虎 二月 帝复病劇 求藥于神山 帝曰 天命自在藥能何爲 晏然而崩).’
 
특히 기록은 내물왕이 병이 생기자 직접 실성의 환국을 요청한 것으로 나온다. ‘백우(신축·401년)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내물왕)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이 모두 황음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제가 이에 일동과 구리내 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 등을 바치고 마아(실성)의 귀환을 청했다(白牛 四月 自春大旱 帝且不寧諸王子皆以荒淫爲事 帝乃遣一同仇里迺等于麗 贈錦帛珍珠 而請還馬兒).’ 이에 따르면 실성의 귀국과 내물왕의 죽음 사이의 인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傳) 내물왕릉의 실제성
 
현재 내물왕릉은 월성 서북쪽 계림 숲속에 소재한 인왕동고분군 30호분이다. 「삼국유사」 <왕력>의 ‘내물왕릉은 점성대(첨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는 기록에 근거한다. 다만 확정이 아닌 전해져 내려오는 전(傳) 내물왕릉이다.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한 인왕동고분군의 현존 무덤은 5개이다. 28호분·29호분·30호분 등 3개는 동쪽, 118호분·119호분 등 2개는 서쪽에 위치한다. 이 중 동쪽의 3개 무덤은 6~7세기 조성된 원형봉토분의 돌방무덤이며, 서쪽의 2개 무덤은 4~5세기 조성된 적석목곽분의 덧널무덤이다. 전 내물왕릉인 30호분은 동쪽의 계림 숲속에 있으며 지름은 20m 정도이다. 5개 무덤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소형급 무덤이다.
 
특히 무덤 아래쪽에 둘레돌(호석) 일부가 드러나 있어 무열왕릉(서악동 소재)과 같은 7세기 후반에 축조된 무덤이다. 따라서 30호분은 마립간 계열의 적석목곽분과는 시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 인왕동고분군 5개 무덤 [사진=필자 제공]
     
그래서 대안으로 인왕동고분군내 서쪽의 119호분을 가장 많이 주목한다. 119호분은 표주박형(표형)의 쌍분이다. 남분은 지름 45m, 북분은 지름 35m이며 두 무덤을 합친 전체 길이는 85m의 대형급 무덤이다. 남분은 남성, 북분은 여성의 무덤이다.
 
하지만 119호분은 결코 내물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 신라 13대 미추왕의 무덤이다. 「신라사초」<미추니금기>에 근거가 나온다. ‘「선지(仙志)」에는 유례니금13년(서기 362년) 신림에서 (미추왕이) 아후(아이혜)를 따라 죽어, 이에 화궁을 대릉으로 하고 사당을 명당이라 이름지었다(史在仙志 儒禮尼今十三年 殉崩于新林 仍花宮爲大陵 廟曰明堂).’ 119호분은 두 사람이 같이 죽어 만들어진 쌍분이다. 남분은 미추왕, 북분은 아이혜 왕후(여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의 실제성(2022. 1. 21)’ 참조)
 
인왕동고분군 118호분이 유력
 
실제 내물왕릉은 어떤 무덤일까. 119호에 인접한 서쪽의 118호분이 가장 유력하다. 118호분은 지름 35m 정도의 중형급 무덤이다. 「신라사초」<실성기>이다. ‘수호(임인) 원년(402년) 2월 7일, 내물제가 붕했다. … 3월, 내물을 옥릉(玉陵)에 장사지냈다(水虎 元年 二月七日 奈勿帝崩 … 三月 葬奈勿于玉陵).’ 실성왕은 402년 2월에 내물왕이 사망하자 서둘러 3월에 장사지냈다. 내물왕의 왕릉 조성과 장례 절차는 채 한 달 정도의 매우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다. 이는 적어도 실성왕이 내물왕릉 조성에 정성을 쏟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연한다. 그래서 대형급 무덤이 아닌 중형급 무덤이 급히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실성왕은 무슨 연유로 사후의 내물왕을 푸대접했을까. 「신라사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실성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누차 볼모를 바꿔달라 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내심 불평을 가졌다(實聖在麗 思歸累請代質 不得 內懷不平).’ 결국 내물왕릉은 실성왕의 불만과 미움이 반영된 무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사초」는 내물왕릉을 ‘옥릉(玉陵)’으로 소개한다. 옥(玉)은 구슬, 보석처럼 사물의 ‘귀함’을 나타낸다. 내물왕릉은 그 자체가 귀함이다. 다만 옥릉 명칭이 당시에 붙여진 이름인지 아니면 사후에 부여된 이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내물왕릉을 옥릉이라 칭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마립간 계열의 시조인 내물왕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 추정 내물왕릉(인왕동고분 118호분) [사진=필자 제공]
  
우리는 경주 한복판에 조성된 수많은 무덤들의 주인공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이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명문의 유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고고학의 힘을 빌어 무덤 양식과 규모에 따라 나름의 기준을 정하고 있다. 특히 규모면에 있어 대형급은 왕, 중형급은 왕족, 소형급은 귀족 정도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내물왕릉은 우리의 판단 기준을 벗어난다. 내물왕과 실성왕 사이의 정치적, 인간적 갈등이 투영된 중형급 무덤이기 때문이다.
 
내물왕릉은 인왕동고분군 118호분이 유력하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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