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전문가칼럼
성헌식의 대고구리
당나라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된 신라왕 김춘추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7-03 13:25:4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660년 3월에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왕자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라 명했다또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으로 삼아 그들을 지원하게 했다김춘추로서는 18년 만에 대야성에서 죽어간 딸의 복수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통상 정벌군의 총사령관에게 직책을 내릴 때는 공격목표의 지명을 붙이는 법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이적 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었다. 요동은 산서 남부에 있는 고구려를 의미하는데, 소정방이 받은 직책의 신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구가 한반도에 있는 지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소정방을 지원하는 김춘추의 직책에 언급된 우이가 한반도 지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서요전(书尧典)>에서는 우이가 사는 곳에는 그 설이 아래와 같이 6개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공전(孔传)> 동표(东表)의 땅을 우이라 칭한다. (동표는 동방변방경계의 바깥)
2.<석문(释文)> 마융이 말하길 우()는 해우(海嵎)이고, ()는 래이(莱夷)이다.
3.<후한서 동이전> ()에는 ()()()()()()()()() 아홉 종족이 있는데, 우이가 사는 곳이 양곡(旸谷)이고 구이를 우이라 한다.
4.<설문(說文)> 우산(嵎山)은 요서(遼西)에 있다. 우철(嵎鐵)이라고도 하며 양곡이다.
5.<설사룡 서고문훈(薛士龙书古文训)> 우이는 해() 부근에 사는 모든 이족을 말하며 지금의 등주(登州)이다. 영해주(寧海州)를 우이(지금의 산동성 모평현)라 했다.
6.<동파서전(东坡书传)> 우이는 동방의 해상(海上)에 있다.
 
▲업성은 후연의 도성, 견성에 堯墓, 양곡에 치우陵, 곡부는 백제 도성 [필자 제공]
 
우이가 살았다는 旸谷(양곡)陽谷의 옛 글자로 고대의 신화전설 중 해가 떠오르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역사 연혁에 의하면, 596년 수 문제 때 처음 설치되어 운주(鄆州), 동평(東平), 수장(壽張)현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현재 행정구역은 산동성 류성(聊城)시 양곡현이다. 바로 부근에 나당연합군의 공격목표인 백제의 도성이 있어야 하는데, 양곡에서 가까운 산동성 곡부(曲阜)의 공묘(孔廟)가 사비성으로 보인다.
  
▲국성의 상징 해자까지 있는 곡부의 공묘는 백제 사비성일 가능성이 크다. [필자 제공]
 
526,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 등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출발해 6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이 래주(萊州)에서 출발해 많은 병선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는 隨流東下라는 문구로 보아 황해를 횡단해서 온 것이 아니라 물길(황하)의 흐름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521일에 김춘추가 태자 법민을 시켜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대총관을 맞도록 하니, 소정방은 법민에게 나는 7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신라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왕성을 깨뜨리고자 한다.”고 말했고, 법민은 대왕은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라도 새벽 진지를 드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했다. 태자 법민이 돌아와 당나라 군대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보고하니, 김춘추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또 태자와 대장군 김유신 등에게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지원하도록 명하고는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사학계는 신라 도성을 경주, 남천정을 경기도 이천으로, 덕물도를 인천 앞바다로, 백제 사비성을 부여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춘추가 도성에서 남천정까지 가는데 3주나 걸렸고, 당군이 덕물도에서 백제 도성으로 진군하는데 50일 걸렸다는 것은 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땅 크기가 넓은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라 하겠다.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에게 계속 패해 전진을 못 하던 신라군은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결국 대승을 거두었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사비성 앞에 이르렀다. 백제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었다.
 
백제 왕자가 당나라 장수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물릴 것을 애걸했으며, 다시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거절했으며, 의자왕의 서자 궁()이 여섯 명의 좌평들과 함께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3일에 의자왕이 가까운 신하들만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 도망쳐 웅진성(熊津城)으로 몸을 보전했다.
  
▲ 18년 전에 백제 윤충 장군에게 붙잡혀 참수된 당시 대야성주 부부. [KBS1 역사스페셜]
 
그러자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도성을 나와 항복하니 김법민이 말 앞에 꿇어 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네 아비가 억울하게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내 마음과 머리를 20년 동안 아프게 했는데,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꾸짖으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못 했다.
 
718, 웅진성주 예식진이 의자왕과 태자를 붙잡아 소정방에게 넘겼다. 이로써 희망의 지원군을 기다리던 백제는 갑자기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신라왕 김춘추는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다고 보고했다.
 
김춘추는 나당연합군에게 붙잡힌 의자왕에게 딸의 복수를 어떤 식으로 했을까?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1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1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541(청담동) 세신빌딩 9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5일,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 조정진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