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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하·은나라보다 상국이었던 고조선
당시 중국 왕조 부침은 고조선 개입 여부에 좌지우지
하·은 두 나라 싸움에 고조선이 적극적인 군사 개입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7-27 09:24:14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단군세기 2세 부루 단군조에 원년(BC 2240) 신축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가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주를 람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 이를 정벌해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동무와 도라 등을 보내 그곳의 제후로 봉해 그 공을 표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부루 단군이 당요(唐堯)의 유혹에 빠져 변절한 중국 총독 우순(虞舜)을 정벌해 파직시키고 치수에 공이 많은 우()를 그 자리에 올리고 휘하 제후들을 새로 파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순의 후계 결정이 세습제가 아닌 선양제가 된 것은 조선의 단군이 요와 순을 엄하게 징계했기 때문이다.
 
4세 오사구 단군조에 “19(BC 2119) 임인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해 람(), 진(), 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했다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군의 신임을 받은 하우(夏禹)의 왕위는 아들 계()로 세습되었고이후 손자 태강(太康)과 중강(中康)을 거쳐 증손자 상(모두가 활 잘 쏘는 후예(后羿)의 반란에 의해 왕위를 잃었다고 한다활 잘 쏜다는 표현으로 보아 후예는 동이족이고 이는 아마도 조선에게 불신임을 받은 표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 대홍수의 진원지인 용문 호구폭포에 세워진 하우의 석상. [사진=필자 제공]
  
위 두 문구에 언급된 람()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통사 참고자료 고대부분-4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蓝水, 源出於山西屯留县西南东流入漳)”라는 설명이 있어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의 지류임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 13세 흘달 단군조에 16(BC 1767) 갑오 겨울, 은나라에서 하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요청해왔기에 읍차 말량에게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도우라고 명하니, 은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기에 군사를 되돌리려 했는데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했다. 이에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해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해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해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한나라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아주 비슷한 내용이 있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성탕이 ()걸왕을 치자고 하자 이윤(伊尹)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마침 걸왕이 진노해 구이(九夷=조선)의 군사를 움직여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자 걸왕이 노해 다시 구이에게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쳤다.”
 
위는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서는 장면인데, 당시 중국 왕조의 부침은 조선의 개입 여부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는 내용이다. 은 탕왕을 보좌했던 이윤은 젊을 때 동이 땅에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라는 유위자(有爲子)의 문하에서 배워가 중국에서 재상정치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 하·은나라와 관련된 주요 지명들. [사진=필자 제공]
 
당시 하나라의 도읍은 안읍(安邑) 부근으로 지금의 산서 남부 운성시 하현(夏縣)이며, 은나라 도읍은 조가(朝歌) 부근으로 지금의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신양시 위휘현이다. 이 두 나라가 싸우는데 조선이 적극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했다는 것은 조선이 이 두 나라와 가깝게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단군세기 21세 소태 단군조에 “47(BC 1291) 경인,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를 침공했으나 우리에게 대패해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주역기제(周易·既济)고종벌귀방 삼년극지(高宗伐鬼方 三年克之)라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13세기에 상나라 무정 왕이 3년 만에 정벌한 귀방은 산서 북부에 있던 작은 나라(方國)라는 설명이 있어 두 기록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색도의 위치는 미상이며 영지는 산서 서남부에 있던 고죽(孤竹)국을 의미하는데, 여하튼 자기들이 패한 기록은 생략되어 있다.
 
은나라와 공존했을 때도 조선은 계속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에서는 서북방 흉노 출신 색불루(索弗婁)가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해 조선의 단군으로 등극했는데, 이때가 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막강했던 때였다.
 
▲ 22세 색불루 단군 존영, 김산호 화백 작품.[사진=필자 제공] 
22세 색불루 단군조에 원년(BC 1285) 병신 11월에 몸소 구환(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해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백성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은나라 도읍은 황하 북부 하남성 안양시 은허(殷墟) 부근이다. 이곳에서 조선이 11월에 은과 여러 차례 전쟁을 한 후 2월에 은을 추격해 황하에서 승전 축하를 받았다는 의미는 조선의 경계가 황하변인 은허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중심부를 만주에서 찾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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