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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주왕의 주지육림과 포락지형은 허구일 가능성 높아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8-04 17:50:3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은나라를 세운 탕()왕의 13세 조상인 시조 설()의 출생이 동이족 특유의 난생설화(卵生說話)인 점으로 보아 은도 동이족이 다스렸던 나라로 보인다탕이 세운 왕조의 이름은 상()이었으나 훗날 은허로 도읍을 옮긴 이후로 은()이라고도 불렸다.
 
은나라는 무정(武丁)왕 이후 8대를 내려가 주(왕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다. 존속기간은 <죽서기년(竹書紀年)>496<삼통력(三統曆)>에는 6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약 130년 차이가 나는데, <단군세기>로 살펴보면 그 중간 정도로 보인다.
 
멸망원인은 주왕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 달기(妲己)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 등 폭압정치로 민심을 잃어 주 무왕(周武王)의혁명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과연 그랬는지 여부는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주왕은 노예 해방, 동남방 회하 유역의 개발과 중원문화의 전파, 국가통일에 기여한 공적이 주 무왕보다 크다는 주장이 있어 그의 폭압정치의 상징인 주지육림과 포락지형 등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백이·숙제(伯夷叔齊)와 주 무왕이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은나라를 망하게 한 주지육림(왼쪽)과 포락지형. [필자제공]
 
백이와 숙제는 조선의 제후였던 고죽군의 장자와 셋째 아들이었다. 고죽군은 막내 숙제가 영명해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숙제는 두 형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왕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양보했다. 그러자 백이는 부왕의 원래 뜻이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고 양보하면서 둘 다 가출해버려 왕위는 둘째 아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두 형제는 고국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다가 어질기로 소문난 서백창(西伯昌=문왕)을 찾아가 늙어진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의 도읍에 도착해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때마침 아들 무왕이 아버지의 위패를 안고 은 주왕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무왕이 타고 가는 말고삐를 붙잡으며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킴을 어찌 효()라 하겠으며, 신하된 자가 자기 주군을 시해하려는 것을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이 사람들은 의인이니 살려 보내라며 구명해주었다.
 
▲ 주 무왕의 출전을 막아서며 천륜에 대해 훈계하는 백이와 숙제. [필자 제공]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모든 제후들이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 모셨으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가 천도와 인륜을 거스르며 세워져 우리가 살 세상이 아니므로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은 청절지사이다.
 
만일 당시 은 주왕이 주지육림과 포락지형에다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 극악무도했던 패륜 군주(悖倫君主)였다면 아마도 의인이며 청절지사였던 백이·숙제가 정변을 일으킨 주 무왕에게 천륜을 운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은 주왕은 당시 하늘이나 백성들에게 탄핵을 받을 만큼 잘못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은나라는 명목상 주 무왕에게 멸망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에 의해 거의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후한 멸망의 직접 원인이 황건적의 난때문이지만, 그 민란의 원인이 고구리와의 두 차례 좌원(坐原)에서의 전쟁에서 한나라 대군이 거의 전멸을 당하는 대패를 당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래 기록 참조)
 
신대왕 8(172),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이 떨어지자 한나라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사기마저 떨어지자 장수들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했다. 이때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해 좌원(坐原)의 들판으로 몰아넣으니 굶주림에 지친 한나라 군사들이 맞서 싸울 힘도 없이 몰살당해 단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고국천왕 6(184) 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왕자 계수를 파견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베어버린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기록이다.
 
마찬가지로 은나라의 멸망 역시 주 무왕의 정변 이전에 아래 단군세기의 기록처럼 이미 조선에게 두 차례 크게 패해 국세(國勢)가 땅에 떨어지고 민심이 흉흉해진 차에 주 무왕의 정변으로 은나라가 망하고 새 왕조인 주나라가 들어섰던 것이다.
 
“23세 아흘 단군 원년(B.C 1237, 갑신) 고불가에게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명하고, 웅갈손을 보내 람()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해 이를 쳐부수었다.”라는 기록과 을유 2년 람국의 왕이 청구와 구려의 왕들과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 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엄(산동성 거야), 서(강소성 서주), 회(안휘성 회북) [필자 제공]
  
회대의 땅은 바로 대산(岱山=태산)과 회수 사이에 있는 하남성 땅으로 당시 은나라 강역이었다. 구체적으로 엄은 淹没巨野라는 기록이 있어 산동성 거야현 부근이며, 조선에서 통치자를 임명했다는 서와 회 땅은 현재 강소성의 서북부에 있는 서주(徐州)와 그 서쪽에 안휘성의 회북(淮北)시가 마주하고 있다. 은 주왕이 회수 유역의 땅을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상관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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