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탐욕인가 어리석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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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탐욕인가 어리석음인가

박혜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8-25 09:11:46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부분이다. 겨울밤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시보다 더 아름다운 산문이다. 수려한 문장이 곳곳에서 빛나지만 사실 이 소설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포위되어 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그 신하들의 피 말리는 47일간을 그린 것이다.

병자호란은 청의 두 번째 조선 침공이었다. 청의 국호가 후금이던 9년 전, 정묘호란 때도 조선은 그들을 당해 내지 못하고 아우의 나라가 될 것을 맹세하며 화의를 맺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명나라를 섬기며 그들을 무시하다가 다시 변을 당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강해져서 망해 가는 명을 딛고 청나라를 건국한 상황이었다.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비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 볼 것이다….”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이 편지글을 보면 비굴한 상대에 대한 경멸이 뚝뚝 떨어져 넘친다. 지지리 못난 왕으로 첫손 꼽히는 인조는 그렇다 치고 그 왕을 에워싸고 갑론을박, 우왕좌왕하던 조선 조정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병자호란은 청 태종과 도르곤, 조선의 인조와 최명길, 김상헌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이기도 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옆에는 도르곤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이 있었다. 홍타이지와 도르곤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로 태어난 형제간이다. 도르곤은 누르하치가 총애하던 세 번째 정부인에게서 태어나 열다섯 살 무렵부터 전장을 휩쓸며 공을 세웠다. 당연히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배다른 형 홍타이지가 후금의 황제가 된다. 그리고 도르곤의 어머니는 순장을 당하고 만다. 도르곤에 대한 견제였다.

억울하게 어머니를 잃고 한을 품을 만도 했지만 도르곤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승전보를 전하며 홍타이지를 보좌하여 청의 건국을 도왔다. 홍타이지 사후에는 마음만 먹으면 황위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어린 조카에게 양보하고 섭정왕이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함락해 청의 천하통일을 완성시킨다.

▲ 청의 섭정왕 도르곤. 청나라 창건의 씨앗을 뿌린 건 태조 누르하치, 청을 건국한 것은 청태종 훙타이지였지만 중원을 정복해 천하통일을 이룬 건 섭정왕 도르곤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조카 순치제는 도르곤을 경계하고 혐오했다. 순치제를 그렇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도르곤의 동생 도도였다. 어머니가 같은 도르곤 3형제는 청나라 팔기군(청의 최정예 여덟 부대)의 삼분의 일 이상을 거느린 막강한 세력이었다. 도르곤 못지않게 뛰어난 장수였던 막내 도도는 형 도르곤이 황위에 오르지 않는 걸 늘 불만으로 여겼다. 그런 도도의 언행이 순치제의 주변에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결국 서른아홉이라는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뜬 도르곤의 의문의 죽음 뒤에는 이런 여러 배경이 있었다.

도도는 한결같이 형 도르곤을 위해 행동했지만 그것이 결국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위함’이란 그 결과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대상이 리더일 때는 ‘위함’의 언행에 각별한 절제가 필요하다. 리더에게는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때로는 명분을 해칠 수 있고 심지어 존재 자체가 명분을 깎아 먹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른바 ‘윤핵관’의 중심인물로 꼽히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바로 존재 자체로 리더의 명분을 해치고 있는 경우다. 핸드폰 문자 노출 사건과 이준석 전 대표 징계 사건이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어서 더욱 그렇다. 사안은 다르지만 권 원내대표는 본의든 아니든 당에 많은 폐를 끼쳤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원내대표의 직을 놓지 않고 있을 뿐더러 최근 출범한 비상대책위원회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체 그것은 탐욕인가 어리석음인가.

그가 정말 ‘윤핵관’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직을 모두 내려놓고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당의 결정에 명분이 서고 대통령의 행보에도 명분이 선다. 권 원내대표가 직을 내려놓고 할 일은 구석구석을 다니며 윤석열정부를 위해 유능하고 참신한 인물을 찾는 일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윤 정부는 총리와 장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상당수를 물갈이 해야 한다. 누가 특별히 나쁘고 못나서가 아니다. 끈질긴 선동과 프레임 씌우기에 이미 대다수 국민이 세뇌되었다. 그들이 정부를 못미더워하는 부분을 메워서 납득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그게 지금 그가 맡아야 할 역할이다. 그래야 진정한 ‘핵관’의 자격이 있음을 부디 그가 깨달아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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