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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사대모화주의였을까?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9 12:26:47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려역사저널 편집인
고려 인종에게 바쳐진 삼국사기의 원작자는 김부식이나 현재 전하는 삼국사기의 최종 각색자는 사대모화사상에 젖어 주체성이 결여된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일 것이다왜 그런지 이해하려면먼저 김부식의 생애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라 왕실의 후예인 김부식은 지위가 높은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해 계속 승진하다가 1135년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문신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142년 인종의 명을 받아 10명의 편수관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해 3년 만에 50권을 완성시켰다.
 
1144년 아들 김돈중이 당시 초급장교였던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는 모멸을 주자 정중부가 대노해 김돈중에게 욕하고 때렸는데 이를 안 김부식이 왕께 고해 정중부를 매질했다. 이 사건으로 김부식은 무신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15177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19년 후인 1170년 무신정변을 주도한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해 두 번 죽었다. 아들 김돈중은 처형되어 저잣거리에 효수되어 그의 가계는 멸족되었다.
 
 
▲부친의 권력을 믿고 정중부의 수염에 불장난을 한 김돈중. [KBS 드라마 ‘무인시대’]
 
여러 가지 전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생전에 발간되지 못해 원고 상태였거나 설사 이후 간행되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집권한 무신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불태워졌을 것이 확실하다. 김부식이 지었다는 문집 20권도 현재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다.
 
그 뒤 고려말까지 언제 얼마나 간행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후 백 년이나 이어진 무신정권 시대와 몽골의 침략지배기에 과연 삼국사기 간행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테고, 또 간행본이나 원고조차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무엇을 근거로 역사책을 부활시킨단 말인가!
 
조선왕조 태조 2(1393)에 민간에 전해 내려오던 원본 1질이 경주에서 발견되어 경상 관찰사의 지시로 간행작업을 계속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김부식의 원본에 가까웠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조선왕조 유학자들의 자국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중종 7(1512)에 다시 간행되었는데 그 원본이 1393년에 간행된 경주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전하는 삼국사기옥산본이 이때 간행된 책자였다. 그러나 경주본은 중종본이 간행되면서 불살라 없어져야 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삼국사기처럼 문구를 새롭게 각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었던 중국의 왕들은 연호를 쓴 황제라고 적으면서, 고구리 태왕들이 사용한 자체연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고 삼국이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칭신했다는 표현이 난무하는 것 등으로 각색되었다. 즉 당시 조선왕조가 상국인 명나라를 섬기는 것처럼 문장의 표현을 정반대로 바꾸었을 것이다.
 
송나라는 사대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 송나라는 고려가 극진히 섬겨야 할 정도로 강대국이 아니었다. 송나라는 중국 통일 이후 요나라와의 투쟁에서 패해 1005년에 전연의 맹약이라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형제의 의를 맺어 요가 송을 형으로 모시고, 둘째 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요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무렵 거란()이 고려를 3차례 침략했는데,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유명한 9931차 침략의 구실이 우리()가 송과 싸우고 있음에도 고려가 송과 교류하며 우리를 멀리했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1010년에 2, 1011년에 3차 침략이 계속 있었기에 고려와 송나라는 서로 원활하게 교류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어 여진(금나라)이 강자로 부상해 송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송의 전공이 없다는 이유로 요가 멸망하면 장성을 두 나라의 국경선으로 하자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일단 약속을 어긴 금이 철수했다가 태조 아골타가 죽고 동생(태종)이 보위에 올라 1125년 송의 도성 개봉으로 순식간에 밀고 내려왔다.
 
송 휘종은 자진 퇴위하고 아들 흠종이 즉위해 연호를 정강(靖康)이라 했다.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강화를 제시하며 모든 조건을 수락했는데, 황금 5백만 량, 백은 5천만 량, 비단 1백만 필, 우마 1만 마리에다가 3개 진을 바치고, 송 황제는 금 황제를 백부로 모신다는 엄청나게 굴욕적인 조건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얼마 후 중원 정복의 야망에 찬 태종이 다시금 개봉성을 공격했다.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붙잡혀 금으로 끌려가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혼덕공(昏德公) 아들은 중혼후(重昏侯)라는 모멸의 칭호를 받았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정강의 변이다.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가 남쪽으로 탈출해 지방호족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르는데 이후를 남송(南宋)이라고 하고 그 이전을 북송(北宋)이라고 한다.
 
금과 남송 사이에 전쟁은 계속되었고 1142년 소흥에서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그 조건은 첫째 송은 금에게 신하의 예를 다하고, 둘째 금의 황제가 송의 왕을 책봉하며, 송은 은 25만 량과 비단 25만 필을 보낸다. 넷째 동쪽은 회수(淮水) 서쪽은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을 국경으로 한다. 북송의 도읍 개봉과 중국의 옛 도읍지 장안이 모두 금나라 강역으로 편입되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김부식이 고려조정에서 한창 성장할 때인 1125년에 정강의 변이 일어나 북송이 망했고, ‘삼국사기를 편찬할 1142년에는 금과 남송 사이에 소흥의 강화가 체결되었다. 당시 중국인 송나라의 상황이 이랬는데 사대모화사상이 고려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평가는 분명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에 마취된 자들은 조선왕조에 따로 있었다.
   
태조 왕건이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했음은 고구려를 계승해 궁극적으로는 그 고토를 수복하려는데 있었다. 인종이 묘청의 칭제건원과 금나라를 치려는 주장에 한때 찬성했다는 의미는 당시 그 시대가 주체 의식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이른바 강단사학계(講壇史學界)에서는 삼국사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삼국이 고대국가의 틀을 마련한 시기는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2세기, 백제는 3세기, 신라는 4세기로 주장한다. 즉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146) , 백제는 8대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 , 신라는 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 때 나라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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