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단신으로 도불, 60년대 망통비엔날레 대상 수상을 비롯 프랑스에서 성공적인 화업을 이루고, 이후 국내 화단에서도 당대 최고 레벨의 명성을 구가했던 어떤 작가가 있었다. 앙포르멜 계통의 추상화지만, 방법적으로나 기교적으로 화면의 중층을 반복적으로 이루면서 대단히 많은 공을 들여야 했으며, 작업에 관한 한 너무도 엄격한 작가였다. 

 

그 이후 필자는 여러 부류의 작가들을 접할 때마다 작가의 작품 양에도 관심을 갖곤 했다. 한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의 양은 장르와 표현양식에 따라 차이가 난다. 따라서 어느 정도가 많은 것이고, 또 적은 것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전시장에서 보통 전해지는 인상에는 그런 양적인 것들도 감지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작품의 양이 빈약하게 느껴질 때, 재능과 잠재력이 뛰어나더라도 프로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런 내 나름의 기준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있는 작가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서양화가 권여현(60. 홍대교수)이다. 

 

그의 전시가 일곱 군데 전시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어 미술계의 화제다. <현대 한국미술의 발견–권여현>전(2023.02.08.~05.12)이다. (전시장 및 일정은 하단 별표 참조 바람) 서울 5개소, 파주 2개소의 전시장에서 무려 25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중이다. 말이 쉽지, 그게 어디 보통 양인가. 양도 양이지만 여러 갤러리들이 함께 나섰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다. 사실 갤러리들마다 자기들의 일정과 성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뜻을 모아 초대형 이벤트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또한 예삿일이 아니다. 미술사적인 비중과 위상, 작품양, 작품들에서 던지는 미학적 화두, 작가의 표현 역량 등의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연합전은 작가의 ‘낯선 숲(곳)의 일탈자들’이라는 주제의 근작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먼저 ‘일탈자들’에 대해 주목해보자.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도 일탈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아 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미적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방치가 아니라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소통과 공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일탈자들은 기성세대가 규범화한 가치와 정서에 공감하거나 편승하지 않고 이미 형성된 세대들의 문화를 배타적으로 고수하는 무리를 의미한다. 제한적으로 볼 때 과거 70년대 월남전에 반발한 히피와 유사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며 머리에 꽃을 달았던 그들, 기치와는 달리 극단적인 염세적, 현실부정적 경향과 광기에 가까운 반항, 대결의식에 휩싸인 그들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오늘의 일탈자들, 이들이 현실세계의 억압이나 단절, 소통장애, 욕구 좌절 등에 직면하여 찾는 돌파구가 ‘낯선 곳’ 혹은 ‘낯선 숲’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저항감이 드는 생뚱한 ‘밈’이나 ‘짤’ 같은 문화 현상에서 잘 나타난다. 이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욕망의 돌파구는 늘 은밀하고 익숙한 낯선 위장된 장소입니다. 억압된 것들은 성적이거나 비도덕적, 반종교적, 반사회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인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작가노트) 작가의 화면에서 ‘낯섦’이란 다소 추상적일 수 있다.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에서 한 발 나아간 공간에서의 돌출행동 등이 자행되는 것과 얽혀있다. 또한 표현상 모호한 묘사나 다분히 환각적인 느낌을 주는 특이한 색조의 분위기에서 짐작된다. 

 

작가의 화면에는 일탈자들의 온갖 행동양식들이 르포처럼 비교적 리얼하게 포착, 표현되고 있다. 점잖은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조롱과 반정서적, 몰도덕적 행위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우리 사회로 국한해서 보면 젊은 세대들의 좌절에서 비롯된, 때로는 자학이기도 한 ‘헬조선’이라는 저주나 비아냥을 감안하면 일말의 동정이나 공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 그림 속 인물들은 나체로 물속에 뛰어들거나, 성인이 되어도 어린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하거나, 껌을 뱉거나, 팬티를 반쯤 내리거나 무표정한 얼굴, 성난 얼굴로 돌아보거나...풍선껌을 불면서 불량함을 표출하거나 개의치 않음을 주장하거나, 사소하게 낄낄거리거나 남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 시선에 대한 역공을 가하거나....”(작가노트) 그렇다면 그러한 반사회적 일탈자들의 행위를 대상으로 한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합리화나 미화의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그 일탈의 항변과 비판을 전하고자 하는 가운데, 그래도 그 안에 인간다운 구석과 순수함이 묻어나는 면을 찾고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는 것은 아닐까. 화면에서 보듯 작가의 시선은 그렇게 혐오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공감으로 접근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화면에서는 속도감 있는 붓 터치가 표현대상을 생기 있게 묘사하거나 몇 가지 서사들이 콜라주처럼 재구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작가만의 시그니쳐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재현과 재구성의 역량은 감각적 모델링과 상상력이 날로 퇴화되고 있는 현대미술 환경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영상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지만, 그림이 그림답기 위한 보루를 개성적 필치와 구성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화면의 색조는 언제나 밝고 쾌청해 보인다. 리드믹한 필치와 어울려 젊은 세대의 감각과 정서를 담아내면서 회화 고유의 감각을 무리 없이 구현해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가가 사회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이 그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예민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 표현의 내공 등의 조건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역량도 역량이지만 작업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남다르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업에 몰입해온 결과가 바로 지금의 기념비적 연합전이라는 결실이다. 시대를 통찰하는 표현이야말로 세계인들이 함께 공감하고 고뇌할 지점이며, 이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더욱 각광을 받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순화동천(2.8~5.12), 

  자하미술관(2.8~2.26),

  헬렌앤제이 갤러리(2.8~3.6)

  북과 바디(3.2~4.1)

  갤러리 FLUX (2.7~26)

  잼일레븐(2.8~5.12)

  북하우스(2.8~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