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민족문화’와 오늘의 ‘국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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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배고픈 시절 자존감 높이려고 문화 공들여
지금은 민족주의의 과잉이 거꾸로 걸림돌
한·미관계 좋은 날씨에 악천후를 생각해야

홍찬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4-26 08:37:30

박정희 시대의 일화다. 1973년 박 대통령이 경주를 찾았다. 귀중한 신라 유물(‘경주 계림로 보검’, 나중에 보물 635호로 지정됨)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유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유물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서둘러 달려왔다.

한 관계자가 그 자리에서 진언을 했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박물관에 관용차 한 대가 없는 형편”이라고. 박 대통령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청와대로부터 자동차 한 대가 내려왔다. 그러나 정작 박물관에는 자동차를 운영할 돈이 없었다. 그 차는 박물관 마당에 그대로 세워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이 그토록 가난했다는 게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먹고 살기도 빠듯해 문화가 ‘사치’와 다름없던 시절, 문화 분야에 일찍 관심을 보였던 박 대통령의 예지도 돋보인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문화 대통령’을 내세웠던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이 호칭에 어울리는 지도자다. 현재 한국 문화를 움직이는 법과 제도를 처음 구축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민족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의 기본 틀이 이때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취는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일부 있더라도 반론이 늘 따라온다. 정치적 의도가 있었고 문화를 통치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선 ‘의도’를 일단 접어두고 ‘결과’만을 놓고 그 시대를 보고 싶다. ‘결과’ 쪽이 실체 파악에 더 정확할 때가 많아서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두 명이 단연 두드러진다. 이순신의 경우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한국은 어찌 되어있을까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등 탁월한 업적뿐 아니라 국가지도자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추앙받는다.

현대에 들어와 이 두 사람을 ‘국민 영웅’으로 소환하는 일은 박정희 시대에 시작됐다. 1967년 이순신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를 10만 평 넓이로 확장해 정비하고 이듬해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박 대통령은 이순신 탄신일(4월28일)에 현충사 참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도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1976년에는 세종대왕이 묻힌 여주 영릉을 재정비했다. 1978년 광화문에 새로 건립한 공연시설의 명칭도 세종문화회관이었다.

경주 개발과 강화도 정비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경주 개발은 우리 전통문화의 뛰어남을 알리기 위해, 강화도 정비는 대(對)몽고 항쟁 등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국사 교육 강화는 1972년 박정희 시대 때 처음 시도된 것이다. 사회 과목에서 세계사와 함께 배우던 국사가 독립 과목이 됐다. 필자도 당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갑자기 국사 과목이 들어간다고 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또한 전국의 대외 투쟁과 연관된 장소들이 정비됐다. 칠백의총, 제승당, 낙성대, 남한산성, 수원화성 등이다.

여기에는 일각에서 문제 삼는 대로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당한 평가를 위해 더 중요한 것은 그 저변에 흐르는 배경이다.

얼마나 가난하던 때였나. 국민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뭐든 안 된다는 패배 의식이 강했다. 북한이 남한보다 국민소득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경제 발전을 하려면 정신적 의식이 절실한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국민에게 알려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세종대왕, 경주와 강화도를 재조명했고 국사 교육을 주문했다. 항일 유적을 정비했고 전통문화를 일깨웠다. 한마디로 민족의식을 일으켜 경제 성장의 정신적 동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오늘날 이순신·세종대왕에 감동하고 자극받지 않는 국민은 없다. 박정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민족적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거꾸로 과다한 게 종종 문제가 된다. 이 또한 박 대통령이 경제 분야와 함께 민족문화 분야에서 이뤄놓은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치명적인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 70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 중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80%를 넘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과잉 민족주의와 한·미관계는 역의 함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둘러싼 민족주의 정서가 후끈 달아오르면 반드시 한·미관계의 악화로 이어졌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 등 여러 악재가 겹쳤던 노무현 정권 때는 ‘미국이 북한보다 우리에게 더 위협적인 국가’라는 여론이 나타날 정도였다.

성숙한 민족주의는 그래서 중요하다. 민족주의 정서의 절제와 적절한 관리는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국익 확보를 위해 불가피한 과제다. 세상은 의외로 쉽게 변한다. 한·미관계의 좋은 날씨에 악천후를 생각해 본다.

홍찬식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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