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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광석 매장량이 풍부한 안라국은 철제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어 백제와 왜, 그리고 한나라 등에 수출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그 나라의 특산물을 사서 다른 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다.
그런데 낙동강 하구에 있는 가락국이 점차 세력을 키우더니 급기야는 안라국을 밀어내고 중계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차지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안라국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자칫하면 가야 연맹의 맹주 자리까지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백제도 가락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왜와 교역하는 데에 거점 역할을 하던 가락국이 신라와 결탁하여 해상교역로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서력 209년 백제 초고왕을 등에 업은 안라국왕 가심(架深)은 군사를 이끌고 가락국의 신풍성(新豊城)으로 쳐들어갔다.
안라군이 쳐들어오자 신풍성주 나합(奈陜)은 성민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안라의 강병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공방전이 벌어진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성이 함락되었다. 간신히 성에서 빠져나온 나합은 급히 말을 달려 도성인 금관성(金官城)으로 향했다.
가락국 왕 거등(居登)은 신하들과 함께 안라군을 막아 낼 대책을 논의했다.
대신 허도(許道)가 입을 열었다.
“안라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아군의 전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백제의 움직임입니다. 그들이 출전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대신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거등왕도 덩달아 불안했다.
“어찌하면 좋겠소?”
“신라에 구원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습니까. 근자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으니 신라군이 도우러 올 겁니다.”
거등왕은 허도를 신라에 보내 구원군을 청했다. 이에 내해왕은 이음을 대장군으로 삼고 군사 1만을 주어 가락국을 구원하게 했다.
이음의 군대가 출정을 앞두고 있을 때 태자 우로가 왕에게 나아가 청한다.
“이번에는 소자도 전장에 나가게 해 주십시오. 아우를 도와 안라군을 무찌르겠습니다.”
“너에게는 태자로서 맡은 소임이 따로 있지 않으냐.”
“국난(國難)이 닥쳤는데 태자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내해왕이 탐탁지 않아 하자 아찬 윤종이 나섰다.
“태자는 타고난 무장입니다. 참전하면 아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태자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신하들도 옆에서 권하니 왕으로서는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로는 이음과 함께 가락국으로 출진했다.
한편, 안라군은 진례성(進禮城)에 당도했다. 성을 포위한 채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온 건 화살 세례였다.
가심왕은 장군 평섭(平夑)과 수항(秀恒)을 보내 양쪽에서 성을 치게 했다. 진례성주 함욱(咸旭)은 성민들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구원군이 곧 당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진례성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심왕은 내일을 기약하며 군사를 물렸다.
“내일 새벽에 다시 공격할 것이니 군사를 푹 쉬게 하라.”
안라국 병사들은 일제히 취침에 들어갔다.
깊은 밤에 금관성에서 보낸 구원군이 안라군 진영으로 소리 없이 접근했다. 가락군은 말에 매를 물리고 말방울을 뗀 상태였다. 안라 군사들은 가락군의 기습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은밀하게 적진에 접근한 가락군은 보초병을 처치한 후 곳곳에 불을 놓았다. 불길이 번지면서 사방이 훤해지자 가락 군사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놀라서 깬 가심왕이 군막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사방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자다가 뛰어나온 안라 군사들은 가락군의 칼날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안라국 왕은 재빨리 말에 올라 달아날 길을 찾았다. 이를 본 적장 무생(武生)이 비호처럼 달려왔다.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무생이 칼을 휘두르며 무섭게 덤벼들자 왕을 태운 말이 놀라 앞발을 들고 일어섰다. 가심왕은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젠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할 때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왕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 장수가 적장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심왕의 사위인 평섭이었다.
“어서 피하십시오. 저자는 제가 막겠습니다.”
안라왕은 반가운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났다.
무생은 다 잡은 물고기를 눈앞에서 놓치게 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칼을 겨누고 평섭에게 달려들었다.
평섭은 날아오는 칼날을 받아 내며 휘하 군사에게 외쳤다.
“어서 폐하를 모시고 가라!”
평섭은 안라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맹장이었다. 그가 칼을 쥐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린다고 하여 혈인검(血人劍)이라 불렸다.
애초에 무생은 평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불과 수합 만에 평섭은 무생을 베어 넘겼다. 야수처럼 달려드는 평섭의 기세에 크게 겁을 먹은 가락 군사들은 오금이 저려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평섭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망친 가심왕은 불모산을 향해 달렸다. 어느덧 동이 터 오는지 주변이 환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추격병이 쫓아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왕은 말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호위하던 군사들도 말에서 내려 사방을 경계했다.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3백은 족히 돼 보이는 가락군이었다.
가심왕은 재빨리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다리 힘이 빠졌는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도움을 받으려 호위병을 찾으니 그들은 이미 저만치 도망치고 있었다.
체념한 안라왕은 탄식했다.
“내 운도 이제 다했구나.”
이때 가락군 뒤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한 무리의 안라군이 가락군의 후위를 공격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안라군의 출현에 가락 군사들은 대적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가락군을 몰아낸 장수가 가심왕에게 다가왔다.
“소장 수항이 폐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수항이 말에서 내려서자 국왕은 벌떡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는 건가?”
“송구합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수항은 가심왕을 말에 오르게 한 후 군사들을 시켜 사방에서 호위하게 했다. 가심왕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평섭이 이끄는 군사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전열을 가다듬은 가심왕은 장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짐은 이번에 큰 교훈을 얻었소. 다음부터는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것이오. 평섭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요.”
안라왕은 수항을 빼놓고 평섭만을 칭찬했다. 그가 이러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안라국의 수항과 평섭은 무예와 지략 등 모든 면에서 쌍벽을 이루는 장수였다. 가심왕은 두 장수를 항상 곁에 두고 아꼈다. 안라국 왕에게는 정음(情音)이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한겨울 눈밭에서 피어난 매화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국왕을 보필하면서 공주와 마주칠 기회가 많았던 두 장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가심왕은 내심 평섭을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었다. 평섭은 칠포국(七浦國) 수장의 아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수항은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왕의 호위무사로 있다가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람들은 근본도 확실치 않은 수항이 높은 직위에 오르자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왕도 수항을 아끼기는 했지만 공주의 배필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가심왕은 좋은 날을 받아 평섭과 공주를 결혼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반듯하고 평판 좋은 평섭보다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항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어느덧 수항을 마음에 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봄이 되어 꽃들이 만발하자 공주는 부왕을 졸라 나들이를 나가게 되었다. 공주를 사랑하는 가심왕은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호위 군사를 딸려 보내기로 했다. 그때 마침 평섭은 왕명으로 사물국에 사신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수항이 군사를 이끌고 공주를 따라나섰다.
공주 일행은 들꽃이 만발한 벌판에 도착했다. 공주는 마음이 들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수레에서 내리더니 벌판 이곳저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시녀들은 공주를 쫓아다니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수항은 공주가 노니는 곳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마라.”
수항은 군사들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멀리서 공주의 비명이 들렸다.
“대오를 갖추고 대기하라.”
수항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소리가 난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공주에게 이르는 길이 수만 리처럼 느껴졌다.
달려가 보니 공주가 들꽃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다. 수항이 황급히 몸을 숙여 무사한지 확인하려 하는데, 눈을 감고 있던 공주가 별안간 팔을 뻗더니 목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수항은 균형을 잃고 공주의 몸 위로 쓰러졌다. 알싸한 꽃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멋쩍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들꽃으로 수놓인 치맛자락 사이로 공주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수항은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한 떨기 꽃 위에 내려앉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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