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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이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둘은 뭇사람의 눈을 피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궁의 후원이나 숲속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육체를 갈구했다.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발 없는 말은 가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추문을 접한 왕은 분노로 손발이 떨릴 지경이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공주와 정을 통한다는 건 왕실에 대한 모독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왕은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라 안에 퍼지면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가심왕은 조용히 일을 수습하기로 했다. 먼저 평섭을 불러 공주와 혼인할 뜻이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이미 공주에게 빠져 버린 평섭은 국왕의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평섭의 의중을 확인한 왕은 곧 수항을 불렀다.
궁내를 돌아보고 있던 수항은 왕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가심왕은 수항이 침전에 들어서자 쌍심지를 켰다.
“너와 공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실이냐?”
수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는 참형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내 너를 아끼는 마음에 이번은 용서하고 넘어가려 한다. 다시는 공주를 만나지 말거라. 이를 어길 시에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항은 가슴이 찢어졌지만 왕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제껏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은 폐하뿐이었다. 내 어찌 왕명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공주를 잊어야 한다.’
아무리 굳게 다짐해도 솟구쳐 오르는 연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가심왕은 모든 조치를 끝낸 후 공주를 불렀다.
“내 평섭과 너의 혼인 날짜를 잡았으니 그리 알고 준비해라.”
공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언젠가는 겪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닥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는 수항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철없는 소리는 그만 해라! 네가 아비의 뜻을 거스른다면 수항 역시 무사치 못할 것이다.”
공주는 수항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말에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처소로 돌아온 공주는 수항에게 시녀를 보내 날이 어두워지면 후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수항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수항은 왕명에 따라 변방으로 떠났고 공주는 평섭과 혼례를 치렀다. 혼례식은 하객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지만 정작 주인공인 공주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듯했다. 그날 수항은 적막한 변방의 성벽 위에서 상처 입은 맹수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가심왕은 오랫동안 수항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안라국에는 그를 대체할 만한 장수가 없었다. 가락국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왕은 어쩔 수 없이 수항을 불러들였다.
그런 곡절 끝에 수항이 가락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진례성의 함욱은 무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의 수비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수하들이 전황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아군에 불리한 사정이 알려지면 민심이 이반할까 봐 두려웠다.
한편, 내해왕의 명령을 받고 금성을 출발한 이음과 우로는 진례성을 향해 밤새 말을 달렸다. 그들이 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도망쳐 온 가락 군사들을 만났다.
이음이 한 군사를 붙잡고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저희는 무생 장군의 휘하입니다. 안라군을 급습했다가 반격을 받아 장군께서는 돌아가시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패잔병의 말을 들은 이음은 당장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안라군과 결판을 내고자 했다.
우로가 반대하고 나섰다.
“무턱대고 공격에 나섰다가는 저들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살피고 대비책을 마련한 후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
우로의 충고에 이음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제가 주장을 맡고는 있지만 경험이 일천하여 미흡한 결정을 할 때가 많습니다. 부디 형님께서 아우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십시오.”
우로가 이음에게 지시한다.
“진례성주에게 전령을 보내 성문을 열고 안라군을 맞으라 해라.”
이음이 의아하여 물었다.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고스란히 내주자는 말씀입니까?”
“저들을 방심하게 하려는 미끼이다. 일을 확실히 하려면 군사들이 성주를 잡아다 바쳐야 할 것이다. 안라군이 마음을 놓고 성안으로 발을 들이면 절반은 성공이다. 방심한 틈을 타서 투항한 군사들이 성문을 열면 저들을 제압할 수 있다.”
우로의 빈틈없는 계책을 듣고 이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장수들도 기꺼이 찬성했다.
“그럼 누구를 선봉으로 삼는 게 좋겠습니까?”
“내가 윤종과 함께 선봉에 서겠다.”
문무를 겸비한 우로가 선봉을 맡아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우로는 전황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성안의 군사들이 호응한다고 해도 좁은 공간에서 많은 적군과 맞닥뜨린다는 건 희생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우로는 부장 서문장(徐門壯)에게 명을 내린다.
“어둠이 깔리면 군사 5백을 거느리고 성문 앞에서 기다려라. 문이 열리면 즉시 성안으로 들어가서 곳곳에 불을 지르고 북과 징을 치면서 함성을 크게 질러 안라군을 교란해라. 그러면 저들은 아군의 수효가 많은 줄 알고 줄행랑치기 바쁠 것이다.”
윤종에게는 성의 후문 쪽에 숨어 있다가 도망쳐 나오는 안라군을 섬멸하게 했다.
밀명을 받은 진례성주 함욱은 수하들과 의논을 마쳤다. 빈틈없이 일을 진행하려면 성의 군민부터 속여야 했다. 성주는 독려를 구실로 군민을 집합시켰다. 연설을 하려고 단 위에 오를 때 수십의 병사가 우르르 달려 나오더니 다짜고짜 성주를 포박했다.
무리 중 우두머리가 보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라군에 성주를 바치고 항복하려 하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소.”
함욱은 욕을 하면서 군사들에게 끌려갔다.
대형을 정비한 안라군은 진군을 거듭해 진례성 앞에 이르렀다. 웬일인지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가심왕은 함정일까 두려워 함부로 진입하지 않았다. 먼저 척후병을 보내려는데, 성의 군민들이 성주 함욱을 포박해서 끌고 나왔다.
평섭이 이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아뢰었다.
“구원군이 패퇴하니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이는 모두 폐하의 위엄 덕분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성으로 들어간 가심왕은 소와 돼지를 잡아 주연을 베풀었다. 진례성 군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성민들은 안라 군사들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승리감에 도취한 안라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맘껏 먹고 취해 갔다.
어둠이 내리고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한 떼의 군사가 성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라군의 경계는 느슨해져 있었다. 심지어 보초병들조차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렸다.
술에 취해 자는 줄 알았던 진례성 장정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마을 곳곳에 숨겨둔 무기를 찾아 들고 슬며시 성문으로 향했다. 이들은 순식간에 성문을 지키던 안라 군사들을 제압하고 성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기다리던 군사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서문장이 이끄는 신라군이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불을 놓고 소란을 피웠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가심왕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왔다. 사방이 온통 불길에 휩싸인 가운데 곳곳에서 피 튀기는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승세는 이미 신라군에게 기울어 있었다.
가심왕은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몇 명의 호위 군사만 거느리고 눈에 띄지 않게 후문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적군에게 발견되지 않고 성문을 빠져나온 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한 무리의 군사가 뛰어나왔다. 앞장선 장수는 팔 척 장신에 화극을 들고 있었다.
신라 장수는 머리위로 화극을 휘저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신라의 장군 윤종이다! 여기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안라국 왕은 기겁해서 황급히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신라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윤종이 가심왕을 노리고 달려드는데, 한 장수가 뛰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왕이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수항이 갑옷에 피 칠을 한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소장이 활로를 뚫을 테니 따르십시오!”
수항은 창을 휘둘러 윤종의 공격을 막아 내는 한편, 진로를 방해하는 신라 군사를 하나씩 베어 나갔다. 겁을 집어먹은 신라 군사들이 뒷걸음질을 치자 빠져나갈 길이 열렸다. 그는 왕을 먼저 도망치게 한 후 계속해서 달려드는 적병을 상대했다.
난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윤종이 화극을 휘두르며 수항에게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해 적장의 공격을 받아냈지만 이미 지친 탓에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격이 거듭될수록 수항의 손놀림은 차츰 무뎌졌다.
가심왕이 멀리 도망쳤을 거로 생각한 수항은 헛손질하는 척하면서 몸을 빼내 달아났다. 수항도 말도 지쳐 있었기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윤종은 창을 안장에 걸고 활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살을 메기더니 멀어지는 수항을 향해 쏘았다. 화살이 바람을 찢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 정확히 등에 박혔다.
수항은 등에 화살을 꽂은 채로 있는 힘껏 말을 달렸다. 피가 흘러 말 등을 적셨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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