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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달아나던 가심왕은 신라군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춰 세웠다. 잠시 내려서 쉴까 고민하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놀라서 몸을 피하려던 왕은 안라의 깃발이 흔들리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앞서 달려온 장수가 말에서 내려 왕 앞에 무릎 꿇었다.
“소장은 평섭 장군의 부장입니다. 그 자는 사세가 불리해지자 신라군에 항복했습니다. 이를 알리기 위해 달려오는 길입니다.”
가심왕은 평섭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다. 제 한 목숨 살겠다고 적에게 항복하다니….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가심왕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멀리서 말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한 군사가 달려가서 급히 말을 끌고 왔다. 왕이 보니 등에 화살이 박힌 수항이 말 등에 엎어져 있었다.
이름을 부르자 정신을 차린 수항이 왕을 보면서 힘겹게 웃었다.
“폐하께서 이리 무사하시니 소장은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다시 혼절했다.
수항의 처절한 모습에 가심왕은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내 어리석어 너를 모질게 내쳤건만, 너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구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가심왕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사경을 헤매는 수항을 맞이한 공주는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간호했다. 수항은 달포가 지나 한 말의 피를 토한 후에야 간신히 소생했다.
가심왕은 수항이 원기를 회복하자 공주와 혼례를 치르게 했다. 이로써 수항은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안라국의 부마가 되었다.
한편, 이음과 우로는 가락국의 도성에 들러 거등왕을 만났다. 가락국왕은 신라 장수들에게 친히 사례하고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 떠나는 길에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수레 열 대를 딸려 보냈다.
내해왕은 이음이 안라군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크게 기뻐했다.
“원로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네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나라의 경사라 할 수 있다.”
이음은 겸손했다.
“장병의 공이 큽니다. 그중에서도 형님의 공이 으뜸입니다.”
왕은 우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질구나. 남에게 공을 돌릴 줄도 알다니. 나중에 크게 쓰임 받을 날이 있을 거다.”
대신들도 이음의 사심 없는 태도를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럴수록 우로는 점점 작아져 갔다.
내해왕은 가락국에서 감사의 뜻으로 보낸 재물을 전공에 따라 고르게 나눠 주었다. 또한 승전을 기념한 대사령을 내려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방면했다.
다음 해 신라에서는 이찬의 자리에 오른 훤견(箮堅)이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시 태자 문제를 끄집어냈다.
“우로가 태자의 자리에 있긴 하지만 자질 면에서는 이음이 훨씬 낫습니다.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이음을 태자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훤견은 간특한 자라 왕의 뜻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해왕으로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 준 처사였다. 그러나 태자를 교체하는 일은 중대한 문제였기에 왕이라 해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내해왕은 공론의 장에 올라왔다는 핑계로 다시 신하들의 뜻을 물었다.
“짐도 이음이 왕위를 잇는 것이 가당하다고 생각하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신하들도 대부분 이음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거칠고 강직한 우로보다는 다정다감한 이음이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단지 장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분위기가 태자의 교체로 넘어가고 있을 때 한 신하가 반대하고 나선다.
지난 진례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일길찬으로 승급한 윤종이었다.
“죄 없는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태자로 삼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용인되면 이 나라는 끊임없는 정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을 겁니다.”
윤종이 말을 꺼내자 이에 동조하는 발언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왕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태자에 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겠소.”
대전에서 태자 위를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우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겼다. 왕명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태자라는 직위가 거추장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태자가 이럴진대 왕이라는 자리는 어떨지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다음 날 우로는 부왕을 찾아가 태자의 인장을 내어놓았다.
“이음은 덕망을 갖추었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토록 하십시오.”
그가 순순히 물러난 덕분에 왕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내해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선포했다.
“형 우로가 아우 이음에게 태자의 위를 양보하길 원하는구려. 서로 양보하는 형제의 우애가 참으로 아름답소. 짐은 우로의 뜻을 받아들여 이음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니 그대들도 흔쾌히 찬성하시오.”
이음은 왕에게 나아가 태자의 자리를 극구 사양했다. 우로가 왕위에 오르는 게 진정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이음이 이렇게 나오니 내해왕도 마냥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평소엔 유순하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지 않는 게 왕자의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물러난 우로를 다시 태자로 삼을 수도 없었다. 왕은 할 수 없이 결정을 훗날로 미루었다.
몇 년 후 이음이 원인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고 나자 신하들은 다시 우로를 태자로 추대하려 했다. 우로는 거듭 고사했다. 왕은 하는 수없이 사위인 조분(助賁)을 후계자로 정했다.
서력 230년 내해왕이 세상을 뜨고 조분이 왕위를 이었다. 조분왕은 벌휴왕의 장자인 골정의 아들로 조부가 죽었을 때 서열로는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나이가 어려 이매의 아들 내해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미안하게 여긴 내해왕은 자신의 딸을 조분에게 시집보내고 돌봐 주었었다.
조분은 풍채가 좋을 뿐 아니라 사리 분별이 명확하여 백관과 백성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우로를 불러 이찬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숙질지간이었지만 연배가 비슷해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이보게, 내가 뜻하지 않게 왕이 되고 보니 모르는 것투성일세. 제발 나를 좀 도와주게나.”
우로는 단칼에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이젠 정사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픕니다. 앞으로는 산천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살려 합니다.”
조분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자네 일신만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나 역시 권좌에 욕심이 있어서 왕위를 받아들인 게 아니네. 이 나라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네. 자네도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발뺌할 셈인가!”
조분왕의 설득에 우로는 이찬의 직책을 맡아 정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서력 231년 우로는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 정벌에 나섰다. 감문국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자리한 작은 나라로 백제를 상국으로 섬기고 있었다.
신라가 감문국을 치게 된 것은 안라국과 맞붙었던 진례성 전투와 연관이 있었다. 백제의 초고왕이 세상을 뜨고 뒤를 이은 구수왕(仇首王)은 지난날 신라의 참전으로 가락국을 응징할 기회를 놓친 일에 대해 껄끄러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우방인 감문국을 내세워 신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감문국 왕은 백제 왕의 명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우두주(牛頭州)를 공격했다. 이 원정에는 백제에서 파견된 군사도 대거 참가했다. 감문군이 쳐들어오자 신라의 내해왕은 이벌찬 충훤(忠箮)에게 군사를 주어 우두주를 구원토록 했다.
충훤은 감문군을 깔보고 무작정 치고 들어가다가 웅곡(熊谷)에 매복한 백제군에게 기습을 당해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왔다. 이에 크게 노한 내해왕은 충훤을 진주(鎭主)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에게 이찬의 직위를 대신하게 했다. 그는 감문국에 복수할 기회를 노렸으나 백제의 반격을 염려해 함부로 쳐들어갈 수 없었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은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지켜보는 주변국들에 신라가 백제에 밀린다는 인상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감문국을 치기로 한 것이었다.
우로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걸수산(乞水山)을 넘어 감문국의 병점 땅으로 진격했다. 신라군의 출현에 놀란 감문국 왕 수발개(首撥介)는 급히 백제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장군 사참(沙參)에게 군사를 주어 병점으로 보냈다.
우로는 사참의 군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백제군이 당도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오. 군을 두 대로 나누어 일대는 사참의 군사를 붙잡아 두고 나머지 일대는 백제군으로 위장한 채 다른 길로 우회해서 감문성으로 가시오.”
우로는 일길찬 윤종에게 사참의 군대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샛길을 이용해 감문성으로 달렸다.
백제의 구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던 감문국 수발개왕은 일대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성 위에 올라 보니 무리의 선두에 백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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