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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아 며칠간의 짧은 방학을 끝낸 이화학당은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등교한 아이들은 설을 쇤 자랑을 하느라 바빴다. 자랑대장은 해린이었다.
“니들, 이거 볼래? 울 아버지가 주신 일본제 필통이랑 연필이야.”
해린은 빳빳하게 코팅된 노랑 천으로 만든 필통을 보여줬다. 가운데는 자석이 붙어있어 잘 열리고 닫혔고, 안에는 알록달록한 연필이 가득 들어있었다. 동물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고 예쁜 서양 인형이 그려진 연필도 있었다.
“우와! 노랑 필통이네! 난 노란색 젤로 좋아하는데!”
애덕의 눈이 동그래졌다.
“촉감이 좋은데?”
보민이 물었다.
“그럼! 조선에서는 이런 거 못 만들어. 아버지가 내 설 선물로 일본에 부탁해서 보내온 거야.”
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비단옷을 입고 학교에 올 수는 없지만 학용품 자랑은 할 수 있었다.
“해린아, 나 이거 공주님 그려진 연필 하나 주라~”
애덕이 노란 연필을 하나 들고 졸랐다.
“줄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뭔데?”
“여기 무릎 꿇고 앉아서 공손하게 두 손을 올리고 ‘해린 공주님, 저 연필 하나 주세요’ 하면 줄게.”
“정말이야?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지?”
“물론이고말고.”
해린과 애덕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반 아이들의 눈길이 모두 그들에게 쏠렸다. 아이들은 앞으로 일어날 재미난 일을 기대하며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까짓 거, 할 수 있어.”
애덕은 금방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내밀었다.
“해린 공주님~” 하고 애덕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누군가 애덕을 확 잡아 일으켰다.
“너, 뭐하고 있는 거야?”
보민이었다.
“아유! 고작 연필 하나 얻어가지려고 이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해린이 너도 그렇지, 친구한테 무릎을 꿇리면 기분이 좋아?”
보민의 등장에 애덕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린은 달랐다.
“보민이 너는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 친구끼리 장난도 못 해? 재미있잖아? 내가 연필을 안 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해린은 오히려 화를 냈다.
“내가 이참에 말해 두는데, 너 심심하면 일본 물건 가져와서 자랑하는데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일본이 싫거든.”
보민이 해린에게 쏘아 붙였다.
“찌질 하긴... 너도 갖고 싶으면 솔직하게 얘기하지, 왜 폼 잡고 그러냐?”
해린도 지지 않고 맞붙었다.
“찌질? 너 말 다했냐?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너는 몰라? 나는 그깟 것 100자루를 갖다 줘도 안 가진다!”
보민이 앙칼지게 말했다.
두 아이의 말다툼 속에서 정작 애덕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한 켠에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보민과 해린이 지난번처럼 한 판 붙을까 보아 마음 졸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고 드루실라 선생님이 들어왔다. 역사수업 시간이 된 것이다. 해린과 보민은 흥분해서 붉어진 얼굴로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 모두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드루실라 선생님은 교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다그치지는 않았다.
“반장, 어디 있니? 인사하고 공부 시작하자.”
선생님의 말씀에 보민이 일어나서 경례 구령을 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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