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5º
습도 70%
강릉 14º
습도 75%
안동 16º
습도 60%
부산 13º
습도 95%
)
서력 234년 구수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후 해씨와 좌보 해웅이 의논하여 서둘러 왕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사반을 왕으로 옹립한 해씨는 선왕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간자를 풀어 살펴본 결과 고이와 진씨 등 주요 세력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태후가 된 해씨는 안심하고 백관에게 장례에 참석하라 지시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 조정의 신하와 귀족들은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입궐 준비를 마친 진충은 진가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준비는 다 됐느냐?”
\
“가주들이 일족의 가병을 하인으로 위장해 궁으로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궁문에서 경계가 삼엄할 테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진충은 상복 안에 입은 갑옷이 눈에 띄는지 다시 한 번 살폈다.
“궁문을 점거한 뒤 신호를 보내면 숙부께서 군사를 휘몰아서 궁 안으로 들어오실 겁니다.”
만반의 준비가 된 걸 확인한 진충은 하인으로 변복한 가병을 이끌고 궁으로 향했다.
진충이 궁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그는 마주치는 가주들과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했다.
선왕의 시신에는 비단 수의가 입혀지고 금동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관 속에는 금동관과 칼·도끼·창·곡옥·관옥 등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식순에 따라 시신이 관에 들어가고 점토를 발라 뚜껑을 봉했다.
태후는 눈물을 훔치며 낮은 소리로 곡을 했다. 장난을 치던 사반왕과 비류 왕자는 태후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이는 선왕의 시신을 보면서 인생이 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눈앞에 닥친 일을 해내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게 인생이었다. 그는 돌아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임시 매장지로 이동하기 위해 관을 들 때였다. 진충의 가병인 냉잠(冷岑)이 비호같이 몸을 움직여 관 뒤에 선 사반왕을 덮쳤다.
냉잠은 천 근을 드는 용사였다. 그의 손에는 시퍼런 단검이 들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괴한에게 사로잡힌 어린 왕은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태후가 기겁하여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폐하를 구하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라 얼이 빠져 있던 호위 군사들이 그제야 창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이때 각 가문의 젊은 공자(公子)와 가병들이 상복 속에 감춰 뒀던 칼을 빼 들고 금군을 막아섰다.
양쪽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을 때 냉잠이 호위 군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사반을 살리고 싶으면 무기를 버려라.”
군사들이 머뭇거리자 몸이 단 태후가 외쳤다.
“어서 무기를 버리지 않고 뭐 하느냐!”
태후는 아들이 다칠까 봐 걱정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났다.
이때 밖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궁문을 지키던 군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뛰어 들어왔다.
“역도들이 궁문을 점령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물이 이끄는 군사들이 물밀 듯이 나타났다. 그들은 해웅을 비롯한 해씨 일족과 금군들을 모두 포박한 후 궁궐 앞마당에 무릎을 꿇렸다.
이를 본 태후가 분통을 터뜨렸다.
“천인공노할 놈들! 선왕의 장례식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왕을 능멸하다니 진정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진충이 나서서 예를 갖췄다.
“어린 왕을 앞세워 권력을 잡고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려는 해씨 일족에 대한 백성의 분노가 하늘을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뜻에 따라 현명한 임금을 세우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할 뿐입니다.”
“왕좌에 눈이 멀어 칼을 뽑아 놓고는 애꿎은 하늘을 들먹이는구나.”
“어찌 감히 신하 된 자가 옥좌를 탐하오리까. 우리가 왕으로 삼고자 하는 분은 고이 왕자입니다. 덕망 있는 분을 받들어 나라를 안돈하고자 합니다.”
진충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모든 사람이 소리 높여 동의했다.
누군가 고이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가더니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을 외치게 되었다.
연호하는 소리가 궁 안을 가득 채우자 주인공 고이가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소. 내 어찌 선왕의 뜻을 저버리고 옥좌에 앉을 수 있겠소.”
“선왕의 뜻을 저버리는 건 괴로운 일이나 불충한 자들로부터 사직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왕자께서 나서 주시지 않으면 온조대왕께서 세운 이 나라는 갈 길을 잃게 될 겁니다.”
진충의 애원에도 고이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래도 군신의 의를 저버릴 수는 없소.”
재차 거절했지만 진충은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신하가 왕자의 덕망을 우러러보고 만백성이 왕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니 세속의 법도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때를 맞춰 연호하는 소리가 커졌다. 그 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궁궐이 들썩일 정도였다. 이쯤 되면 사양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이는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의 뜻이 이러할진대 내 어찌 홀로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고이는 태후를 돌아보며 말한다.
“신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소서.”
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대세는 고이에게 기울어 있었다. 여기서 배짱을 부려 봤자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사반왕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려서 몹시 떨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태후는 모든 걸 체념했다.
“부디 우리 모자의 목숨만은 보장해 주시오.”
고이는 흔쾌히 약속하고 군중을 향해 나아갔다.
진충은 태후와 사반·비류를 별궁에 유폐하고 해씨 일족을 옥에 가두었다.
고이왕이 등극하자 해씨를 미워하던 백성은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자 남은 해씨 일족은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모색했다. 옥에 갇힌 가주를 대신해 아우인 해평(解平)이 모임을 주도했다.
해평의 아들 해우(解牛)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진씨 도당이 우리를 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당장 가병을 무장시켜서 장차 있을 저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해평이 아들을 타일렀다.
“저들이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지금 궁으로 들어가 담판을 지을 것이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해평은 혼자서 궁으로 갔다.
궁문에 도착한 그가 왕을 뵙기를 청하자 고이왕은 흔쾌히 허락했다.
“해씨는 건국 이후로 많은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나라의 지주(支柱)로서 일조한 바 큽니다. 넓은 아량으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면 목숨을 다해 폐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나이다.”
고이왕은 한때 해씨들에 의해 탄압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나라를 생각하면 해씨를 포용해야만 했다. 비록 기선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쌓아 온 해씨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나라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었다. 해평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홀로 찾아와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진충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이는 폐하를 속여서 시간을 벌려는 수작입니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훗날 세를 규합하여 쳐들어올 겁니다. 당장 저자를 감옥에 가두고 군사를 보내 잔당을 섬멸하십시오.”
명령조의 말투에 고이왕은 기분이 상했다. 비록 진충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해씨가 집권할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이왕의 진정한 바람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고이왕은 일부러 해평을 부드럽게 대했다.
“그대의 충심은 충분히 알겠소. 짐도 그대들에게 모질게 굴 생각은 없소. 앞으로도 변함없는 충성을 바라오.”
고이왕은 감옥에 갇힌 해웅을 방면하여 해평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진충은 왕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해웅을 풀어 주는 것은 간신히 잡은 호랑이를 산속에 놓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겁니다.”
고이왕이 찬찬히 타일렀다.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오. 만일 내란이라도 일어나면 주변국들이 가만있겠소. 당장 급한 것은 정국의 안정이오. 당분간 해씨 문제는 덮어 두기로 합시다.”
이어진 조치 역시 파격적이었다. 고이왕은 태후 모자를 별궁에서 풀어 주고, 사반을 선왕의 예로써 대우했다. 이로써 표면적으로나마 백제의 정국은 안정을 찾았다.
집으로 돌아온 해웅은 자리에 몸져누웠다. 습한 감옥에 갇혀 있다 보니 한기(寒氣)가 골수에 퍼져 병이 난 것이었다. 증상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던 해웅은 잠시 정신이 돌아오자 아우 해평을 불렀다.
“아무래도 내 수명이 다한 것 같구나. 당분간은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라. 머지않아 재기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날 밤 해웅이 죽었다. 해평은 형의 유언을 잘 지켜 나갔다. 이로써 진씨와 해씨의 갈등도 일단락되는 듯했다.
한편, 해우는 아무 말 없이 혈구도(穴口島·강화도)로 떠났다. 해평이 심복을 보내 돌아오라 종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성에 있으면서 진씨 일족에게 머리 숙일 생각만 하면 피가 끓어오르기 때문이었다.
해우는 막역한 친구인 혈구도주 적발구(赤發仇)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곳에서 재물을 풀어 민심을 얻고 비밀리에 사병을 모아 힘을 키워 나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