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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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은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짐도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여질의 말은 물이 흐르듯 이어졌다.
“셋째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장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관개 시설을 만들고 효율적인 농사법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매년 각 고을에서 소출이 많은 농부를 선발하여 상을 주고 그의 비법을 다른 농가에 널리 알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백성이 저마다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궁궐 안에 논밭을 만들어 폐하께서 친히 농사짓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농자(農者)의 사기를 돋우시고 지방관들을 독려해 권농(勸農)에 힘쓰도록 하십시오. 백성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부패한 관리를 적발해 징벌하는 것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의 살림이 풍성해질 테고 더불어 나라의 곳간도 가득 찰 겁니다.”
고이왕은 얘기만 들어도 배가 부른 듯했다.
“이 모든 것을 실행하면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면 십 년 안에 부강한 나라로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왕은 부여질의 청산유수와 같은 말에 몸과 마음이 시원했다.
고이왕이 우보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하자 부여질은 정중히 사양했다.
“소인이 아무 공도 없이 우보의 자리를 차지하면 시기하는 무리가 많을 겁니다. 저보다 훌륭한 인재를 찾아 중용하십시오.”
왕은 간곡했다.
“숙부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찌 대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고이왕에게 귀족 세력과 맞서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부여질도 이를 잘 알기에 더는 거부하지 못하고 우보의 직위를 받아들였다.
부여질이 우보에 임명되자 진충이 국왕을 찾아와 불평을 늘어놓았다.
“왕숙(王叔)이라고는 하지만 정무 경험이 없는 이에게 우보라는 중책을 맡기시다니요. 이는 무리한 일입니다.”
그는 내심 우보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부여질은 덕망과 경륜을 갖추었으니 재상이 지녀야 할 자질은 충분하오.”
고이왕이 뜻을 굽히지 않아서 진충은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진충은 아들 진가를 불렀다.
“누구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나를 이리 홀대한단 말이냐!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우보 자리는 진작 나의 차지가 돼야 했다.”
진가는 아버지를 다독였다.
“지금은 불만을 드러낼 때가 아닙니다. 왕과 우리 가문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기미만 보여도 다른 대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겁니다.”
고이왕은 대성(大姓)을 중심으로 도성의 체제를 5부로 개편했다. 이것은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선에서 귀족의 기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관료 조직에는 6좌평을 두고, 정무 분야를 나누어 관장토록 했다. 또한 관등을 16개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관복(官服)을 달리하여 신분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관료 조직의 확충으로 고이왕은 든든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가문의 이익을 중시하는 귀족과 달리 관리는 왕명에 복종하는 존재였다.
군제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군대를 통합하여 5군으로 정비하고, 좌장(左將)을 두어 총괄하게 했다. 각 군을 1만으로 편제했는데, 이는 유사시의 인원으로 평시에는 3천을 넘기지 않았다.
진씨와 각 대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진충의 아우인 진물을 좌장으로 삼아 병마사를 겸하게 하고, 가주들을 각 부의 우두머리로 임명했다. 그중에서도 인재라 불릴 만한 사람에게는 좌평의 직위를 맡겼다.
왕제인 부여우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내신좌평, 진충의 아들 진가가 창고와 재정을 다루는 내두좌평, 우두가 예법과 의례를 살피는 내법좌평, 고수가 왕궁 숙위를 책임지는 위사좌평, 곤노가 형옥을 맡는 조정좌평, 유기가 외방의 방위를 총괄하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각 귀족의 영향력에 따라 관등을 매기고 관료로 등용했다.
나라의 체제가 정비되니 모든 신하가 왕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면 단시간에 말단 관리에게까지 이르렀다.
고이왕은 지방관에게 명해서 황무지를 파악하게 하고 백성을 독려하여 개간했다. 벼농사를 장려하고 농사 기술을 보급하면서 수확량이 늘어나니 백성의 입에서는 풍년가가 절로 나왔다.
또한 전국을 5개 지역으로 구획하고 왕실의 종친을 내려 보내 관리를 감찰하게 했다.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니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사라졌다.
내정의 기틀을 잡은 고이왕은 군사를 양성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이리하여 백제는 나날이 강성한 나라로 변모했다.
자신감이 생긴 고이왕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수선한 서방과의 교역로를 정비하고 겁 없이 덤벼드는 신라와 가락국도 응징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북방에서는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로 쳐들어와 도성까지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결국 고구려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본 양국은 한동안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고이왕은 부여질과 앞일을 의논했다.
“신라와 가락국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우보 생각은 어떠십니까?”
“원정을 나서기에 앞서 주변 정리부터 해야 할 듯합니다. 고구려는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졌으니 당분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남쪽에 도사리고 있는 마한의 잔당은 위협이 되니 먼저 토벌해야 합니다.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통교함으로써 황하 이남과의 교역로를 굳건히 하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연후에 신라와 가락국을 차례로 친다면 남방의 패권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겁니다.”
부여질의 혜안은 감탄이 절로 나게 했다.
얼마 후 고이왕은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했다. 위나라와 힘을 겨루고 있던 오왕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백제 사신을 융숭히 대접하고 친교를 맺었다.
한편으로는 왕명을 받은 진물이 금마국(金馬國)으로 쳐들어갔다. 이 나라에는 온조왕 때 쫓겨난 마한의 잔존 세력이 명맥만을 유지한 채 웅거하고 있었다.
백제군이 나타나자 마한 왕 모극(慕棘)은 장군 천봉(天奉)을 시켜 막게 했다. 천봉의 군대는 금강(錦江) 하구에서 백제군과 맞닥뜨렸다. 백제군은 진영이 정연하고 군사들의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백제군의 군세에 압도당한 금마군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침내 백제군이 쇄도해 오자 천봉은 겁을 집어먹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장수라는 자가 싸워 보지도 않고 달아난단 말이냐!”
천봉이 뒤를 돌아보니 텁석부리 수염에 곰 같이 생긴 장수가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천봉은 텁석부리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기겁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했다. 그런데도 둘의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텁석부리는 천봉의 뒤로 바짝 따라붙더니 도끼로 천봉의 목을 내리쳤다. 그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텁석부리의 이름은 진복(眞福)이라 했다. 그는 진충의 서출(庶出)로 자부심이 대단하고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평소 말을 함부로 하고 폭력적이라 집안 식구들조차도 그를 멀리했다. 아버지 진충조차 골칫거리로 여겼는데 유일하게 진물만이 그를 아꼈다. 용력이 세고 도끼를 잘 쓰는 것이 무예를 좋아하는 진물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진복이 적장의 목을 베고 금마군을 격파하자 진물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며 크게 치하했다. 그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조카를 선봉장으로 삼아 금마성으로 쳐들어갔다.
마한 왕 모극은 천봉의 승전 소식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장군 서임(徐任)이 달려오더니 비보를 알렸다.
“방금 목 없는 시체를 매단 말이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갑옷을 보니 천봉 장군의 시신인 듯합니다.”
마한 왕이 놀라서 연병장으로 나가 보니 땅바닥에 천이 덮인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국왕이 시신을 확인하고 망연히 서 있는데 패잔병이 하나둘씩 성안으로 들어왔다.
“백제군의 기세로 보아 이곳에 있다가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어서 성을 빠져나가시지요.”
서임이 재촉하자 왕이 침통하게 물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일단 금천을 건너 해남으로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때 성벽을 지키던 군사가 달려와 백제군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다.
“폐하,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서임은 왕을 모시고 서둘러 성문을 빠져나갔다.
마한 왕이 달아나자 성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백제군을 맞아들였다. 힘들이지 않고 금마성에 입성한 진물은 진복에게 마한 왕을 쫓게 했다.
진복이 한참을 달려가니 멀리서 도망치는 마한 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군사들을 재촉하여 왕과의 간격을 차츰 좁혀갔다. 적장이 등 뒤까지 쫓아오자 서임이 돌아서서 진복의 앞을 막아섰다.
진복의 도끼가 서임의 칼 위로 떨어지자 시퍼런 불똥이 튀며 굉음이 울렸다. 서임이 짚동처럼 말 위에서 떨어졌다. 마한 왕의 신세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왕은 몇 마장도 못 가서 진복이 던진 도끼를 등에 맞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마한의 잔존 세력까지 쓸어버리고 해남까지 영토를 넓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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