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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286년 새해가 밝았다. 일우는 병을 핑계로 온천욕을 하겠다며 백암(白巖)으로 떠났다. 소발은 애첩까지 대동한 채 따라갔다. 온천에 몸을 담근 두 사람은 밀담을 나눴다.
일우가 손가락으로 물을 튀기며 지껄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드디어 거사를 일으킬 때가 된 듯하구나.”
격정적인 일우에 비해 소발은 신중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성안에서 내응하는 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국상과 안국군이 나랏일을 전횡하고 있는 탓에 다른 대신들의 불만이 크다. 특히 명림홀도는 상루를 시기하고 있다.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앞일을 모의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술잔도 오갔다. 온천의 열기에 취기가 더해지면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냉정한 소발조차도 거사가 성공한 양 마음이 들떴다.
처소로 돌아온 소발은 애첩 향월을 끌어안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향월은 소발을 부축하여 침상에 앉혔다.
“그리 보이냐?”
소발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눌렀다.
“입가에 웃음이 번져 있습니다. 소첩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까?”
향월은 왕제의 목에 팔을 두르며 교태를 부렸다. 그녀의 향기에 취한 소발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나라가 곧 내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일우가 왕좌에 앉겠지만 단순한 위인인지라 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 굳이 조심해야 할 사람을 꼽으라면 간계가 뛰어난 명림홀도 정도였다.
향월은 불순한 음모가 움트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는 몰라도 된다.”
향월은 왕제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토라진 모습에 애가 단 소발은 너털웃음을 보이며 애첩을 달랬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취기가 오른 소발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토설하고 말았다.
술김에 털어놓은 얘기는 대담한 역모였다. 그녀는 이 엄청난 얘기를 듣고 가만있을 수 없었다.
향월은 어린 시절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서 살았는데 형편이 무척 어려웠다. 우연히 그녀의 사정을 들은 상루는 때마다 곡식과 약재를 보내면서 돌봐주었다. 그녀는 이를 평생 갚아야 할 은혜로 여기고 항상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소발의 눈에 들어 그의 애첩이 된 후에도 향월은 은인인 상루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소발이 꾸미는 거사가 성공하면 아버지 같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소발이 곯아떨어지자 향월은 침소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서둘러 서찰을 쓴 후 심복을 불러 상루에게 급히 전하게 했다. 한달음에 도성에 도착한 심복은 곧바로 국상을 찾아가 서찰을 전했다.
향월의 밀서를 읽고 소발 일당의 역모를 알게 된 상루는 즉시 왕에게 달려갔다.
보고를 들은 서천왕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당장 저들을 토벌해야 하지 않겠소?”
상루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역모에 얼마나 많은 자가 연루되어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이럴 때일수록 계책을 써야 합니다. 백암으로 사자를 보내 일우에게 국상의 자리를 주겠다고 하십시오. 그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사실 겁이 많습니다. 게다가 야망만 클 뿐 우유부단한 자입니다. 분명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반 대신 국사를 좌우하는 국상의 자리를 선택할 겁니다. 그가 입궐하면 무사들을 숨겨 두었다가 포박하면 됩니다.”
서천왕은 일우에게 사자를 보냈다. 그는 왕제에게 교서를 전달했다.
“국상이 건강이 악화하여 물러난다 합니다. 폐하께서는 그 후임으로 왕제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어서 도성으로 돌아와 국사를 맡아 주십시오.”
사자가 물러간 후 일우는 소발을 불러 상의했다.
“폐하께서 이제야 나의 진가를 인정하시나 보다. 국상이 되어 실권을 쥐게 되면 왕위는 자연히 내게로 오게 되어 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를 일으킬 필요가 있겠느냐.”
소발이 정색하고 반대했다.
“이제껏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갑자기 국상으로 임명한다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이는 필시 우리를 꾀어 내기 위한 술책입니다. 아무래도 계획이 들통난 것 같습니다. 이대로 도성으로 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가지 마십시오.”
“그건 기우다. 우리의 계획을 그들이 어찌 안단 말이냐. 폐하께서 진작부터 우리를 염두에 두고 계시다가 이번 기회에 마음을 써 주신 것이다. 가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받을 수 있다.”
소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쳐들어가야 합니다.”
이미 눈앞의 이익에 현혹된 일우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국상이 되면 너에게 병마사 자리를 주마. 우리가 힘을 합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우의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에 소발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두 왕제는 수하 군사를 백암에 대기시킨 채 도성으로 돌아갔다.
일우와 소발이 궁에 도착하자 서천왕은 반갑게 맞이하고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했다. 경계심을 품고 있던 두 사람은 왕의 지극한 환대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두 왕제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자 왕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던졌다. 이를 신호로 사방에서 역사가 뛰어나와 두 사람을 포박했다.
서천왕은 일우와 소발을 꾸짖었다.
“종친으로서 임금을 보위하고 왕실을 지켜야 할 너희가 모반을 꾀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봐라! 증인까지 데려왔다!”
서천왕은 말을 마치면서 기생 향월을 대령시켰다.
두 왕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서천왕은 당장 군사들을 시켜 일우와 소발을 끌고 가 참형에 처하게 했다. 잠시 후 두 개의 머리가 놓인 쟁반이 들어왔다. 흘러넘친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를 본 신하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서천왕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이걸로 일단락 지으려 하오. 그대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시오.”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중에서도 역모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우와 소발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잔당은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갔다. 명림홀도도 숨을 죽였다. 이로써 왕실은 안정을 되찾았다.
서력 292년 서천왕이 붕어하자 태자 상부(相夫)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14대 임금인 봉상왕(烽上王)이다.
봉상왕은 어릴 때부터 방탕하고 교만했으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은 태자 시절 스승인 명림홀도뿐이었다.
봉상왕이 등극하자 명림홀도는 마침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는 그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사람들을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명림홀도는 왕에게 속닥였다.
“왕숙 안국군 달가가 역심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워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데다가 병마사로서 병권까지 손에 쥐고 있으니 어찌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가 모반을 일으키면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미리 선수를 쳐서 없애는 게 좋겠습니다.”
봉상왕은 덜컥 겁이 났다. 그 역시 모두의 신망을 받는 달가를 시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안국공은 고구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병법의 대가로 인정받을 정도로 군사를 부리는 데 능했다. 그가 편찬한 ‘안국병법(安國兵法)’은 이전의 어느 병서보다 훌륭했다. 이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심오한 지략과 정연한 논리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부왕인 서천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숙부를 해친단 말입니까.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분을 무고하게 죽인다면 모두가 짐에게서 등을 돌릴 겁니다.”
봉상왕은 슬쩍 속내를 감췄다.
명림홀도는 왕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속으로 웃었다.
“신하가 왕을 뛰어넘는 지지를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역죄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왕의 역린을 건드렸다. 누가 봐도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명림홀도는 품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냈다.
“이것은 달가가 아들 투영(透永)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심복을 시켜 달가의 집을 감시했는데 어젯밤 어둠을 틈타 집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있었답니다. 잡아서 몸을 수색해 보니 이것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무렵 달가는 북변의 방비를 점검하기 위해 신성(新城)에 머물고 있었다.
서찰에는 달포 후에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 성안에서 내응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것은 명림홀도가 거짓으로 꾸민 문서였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왕이 놀란 척 묻자 명림홀도는 준비한 간계를 내어놓았다.
“자객을 사자로 위장해 달가에게 보내는 겁니다. 폐하께서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 술과 고기를 보냈다고 하면 안심하고 맞이할 겁니다.”
“달가를 감당할 만한 자객이 있습니까?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뒷감당이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봐 둔 자가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자신만만한 답변에 왕은 안심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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