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97] 차이나 엠프레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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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연재소설

조선은 궁무를 제도화했어요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5-24 09:00:13

“고려와 조선은 궁무(宮巫)를 제도화했어요. 기우제는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오악에 지내는 제사는 도교와 무교가 함께 힘쓰는 일이란 건 누구나 압니다. 게다가 세자 저하의 건강과 왕실의 안위는 어느 왕조, 어느 임금을 막론하고 종묘와 사직의 최고 관심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국본(國本)이 되실 세자저하의 건강을 비는 것은 중전마마의 도리이기도 하지요. 왕비와 전하께서는 대대로 지켜오는 전통에 따르셨을 뿐입니다. 이범진은 나라의 제도와 전통을 모르고 있습니다.”

윤치호가 거들었다. 베베르 공사의 전언에 따르면 고종은 이범진의 소위 직언에 대단히 진노했다고 한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긴 회랑을 걸은 뒤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민영환은 민영익의 방으로 향했다.

“민 공, 내가 긴히 드릴 말이 있어요. 이번에 중요한 임무로 러시아로 가지만 그들을 너무 신뢰하진 마세요. 일본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노란 피부를 가진 동양인이 아닙니까? 흰 피부에 큰 코를 가진 서양인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압니까. 제가 가볍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민영익은 민영환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의 크고 깊은 눈이 번쩍였다.

“저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의 뜻이 계시니 온 힘을 다해 보필할 따름이지요. 이번에 가면 러시아란 나라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고 오려고 합니다.”

“나야 이제 물러나 대나무나 그리고 있지만 민 공은 소중한 임무를 맡으셨으니 돌아오실 때까지 공부자께 늘 기도드리겠습니다.”

민영익이 민영환의 두 손을 힘 있게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민 공 또한 전하의 비자금을 맡아 관리하고 계십니다. 홍삼 전매를 통한 비자금은 절대 왜인들에게 들키시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은 마음으로 포옹했다. 호텔 밖에서는 전등과 가스등이 상하이의 밤을 수놓고 거리에는 관과 현의 음악이 어지러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사절단은 민영환의 방에 모여 앉아 구체적인 여정을 의논했다. 그들은 우편함 차이나 엠프레스 호를 타고 상하이·나가사키·요코하마·벤쿠버를 지나 철도로 뉴욕에 도착하고, 거기서 배편으로 영국에 가서 철도로 런던·베를린·모스크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조선사절단은 4월11일에 마차를 타고 부두에 도착했다. 아침 7시였다. 차이나 엠프레스 호는 아주 화려했고 특히 1등 선실은 호화로웠다. 하지만 사절단이 있는 2등 칸은 어둡고 악취가 풍겼다. 윤치호는 역겨운 냄새에 불쾌해했다. 배는 나흘 후인 16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행은 도쿄에 가서 러시아 공사관을 방문했다.

일본에 가 있는 슈페이예르 공사가 민영환 일행을 만찬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도쿄에 자리한 공사관 건물은 화려했다. 조선사절단은 공사의 안내로 관사에 들어갔다. 응접실의 정중앙에는 고종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국왕께서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만큼 슈페이예르 공사에 향하는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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