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98] 도쿄에서 태평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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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나그네 세월만 급해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5-25 09:00:25

사절단은 고종의 어진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공사 부부의 접대는 정성스러웠다.

사절단을 위해 조선식 음식도 장만해 두었다. 부인 안나는 러시아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어서 사절단의 마음은 즐거웠다.

“오시면서 불편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슈페이예르가 물었다.

“모든 것을 주밀하게 장만해 주셔서 이곳까지 잘 도착했습니다.”

민영환이 대답했다. 도쿄에 들러 슈페이예르 공사를 만나니 반갑고 마음이 놓였다.

“윤 공은 어떠십니까?”

슈페이예르 공사가 윤치호에게도 말을 걸었다.

“배에서 냄새가 나서 좀 불편했는데 일본에 도착하니 머리가 개운합니다. 15년 전 어려서 왔을 때보다 크게 발전한 모습입니다. 조선은 언제나 이렇게 개화할지 부럽기만 합니다.”

민영환이 소회를 말했다. 겨우 열 다섯 살 때 일본을 경험한 그에게 이 나라는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게 깨끗하고 앞서가는 나라였다.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한 시간 걸렸습니다. 기차란 것이 그렇게 빠르군요. 번개가 번쩍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도쿄에 와 있어요. 게다가 이 도시는 어떻게 이토록 화려하고 완벽할 수 있단 말입니까?”

김득련이 올라간 눈꼬리를 더욱 치키며 말했다. 40대 중반의 김득련은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중간키에 뚱뚱한 몸매였다. 짙은 눈썹과 뭉툭한 코가 인상적인 얼굴인 그는 식성이 좋아서 먹는 것을 즐겼고 술도 많이 마셨다. 안나가 신경 써서 장만한 갈비찜에 푹 빠져서 한껏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런 김득련을 민영환은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았다. 김득련과 민영환은 친척 사이로 십 년 넘게 마음을 나누는 친한 사이였다. 성격은 많이 달랐다. 김득련이 낙천적이고 편한 성격이라면 민영환은 예민하고 초조한 편이었다.

“그렇게 느끼셨겠지요. 이제 미국을 거쳐 유럽을 지나시면 일본과는 다른 풍경을 보실 겁니다. 특히 미국은 신생국가이지만 무섭게 발전하고 있지요.”

슈페이예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쪼록 긴 여정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공사관의 여주인인 안나가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다. 사절단 일행은 조선 공사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날인 4월17일에 민영환 일행은 기차역에서 슈페이예르 공사와 작별하고 요코하마로 향했다. 그들 앞에는 짙푸른 태평양과 드넓은 대륙이 펼쳐져 있었고, 열이틀에 걸친 긴 항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영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번개처럼 질주하는 일본의 기차를 조선에 들여 놓고 싶었다. 서양식으로 반듯하게 정돈된 서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는 큰 숨을 들이쉬었다. 일본보다 더 발전했다는 유럽과 미국의 모습이 궁금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담아다가 개명된 조선을 꾸리고 싶었다.

곁에서 김득련의 시가 들려왔다.

“고래 악어 물결 드넓어 끝없고 해 돋는 곳 지척인데

만 가닥 붉은 빛 바다 속 퍼지더니 아침 해 한 덩이 하늘로 불쑥 치솟네.

늦봄 날씨 가을보다 싸늘해 밤새 북풍에 비가 내리누나.

머나먼 이역 날씨 낯설기만 하고 길 떠난 나그네 세월만 급해.

외로운 배 내일이면 태평양으로 미국 길 오른다지만

앞길 헤아리니 절반도 오지 못해 바쁜 맘 잠시도 쉴 수 없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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