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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 정원에 흰빛 청초한 데이지와 화사한 분홍 라일락이 고개를 내민 봄 날 오후, 유제니를 찾아 온 여성이 있었다. 보라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구니를 든 품위 있는 중년여성이 공사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공사관 앞뜰에 섰다. 라일락 내음이 코끝에 어지러이 전해졌다. 곧이어 공사관 직원이 나와 2층에 있는 공사 부인 유제니의 방으로 안내했다. 유제니의 방은 붉은 3층의 조선자개농과 우아한 러시아풍 소파가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샐리.”
노란 드레스 차림의 유제니가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우아하게 올렸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좀 한가하다고 해서 얼른 채비를 하고 왔지요.”
샐리는 유제니와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그녀는 주한 미국 공사 존 마헤름 베리 실의 부인이다.
“정원에서 발이 안 떨어져서 혼났어요. 데이지와 라일락의 조합이 마음을 훔쳐가네요. 이름 모를 작은 꽃들도 많구요.”
샐리가 감탄했다.
“손탁 언니 솜씨랍니다. 언니는 뛰어난 원예가에요. 조선의 들꽃들도 많이 키우고 있어요. 채집해서 표본도 만들어 두었어요. 식물학자 같아요.”
웃으며 말하는 유제니의 얼굴에 새로 생긴 주름이 보였다. 샐리는 안타까웠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선의 국왕과 정부가 통째로 이사를 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저도 조선의 꽃들을 분양받고 싶은데요? 손탁 언니한테 특청을 넣어 주세요.”
샐리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럴게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오늘은 국왕께서 경운궁에 행차하셨어요. 그곳에서 행사가 있답니다. 그래서 베베르와 제게는 휴일이나 다름없어요.”
“이 좋은 봄날에 우리도 소풍 한 번 가야 하는데, 대장격인 두 분이 바쁘시니 꼼짝도 못하고 있어요.”
샐리가 국화차를 마시며 말했다.
“왕비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우리들도 즐겁게 지냈지요? 작년 봄에는 두 번이나 나들이를 갔는데...”
유제니의 눈빛에 봄 소풍의 밝은 기운이 맴돌았다.
“기억나요? 5월에는 북한산성으로 6월에는 가까운 남산으로! 그 때가 그립네요.”
“맞아요. 스크랜튼 부인의 도시락에 벌이 윙윙거려서 베베르 공사께서 용감하게 벌과 싸우던 모습이 떠올라요.”
샐리의 말에 유제니가 폭소를 터트렸다. 달콤한 딸기잼에 홀린 벌을 내쫓는다고 남편이 모자를 휘두르다가 허우적대며 엉덩방아를 찧은 장면이 생생했다.
“넘어져서 다행이지 안 그랬음 남편 얼굴이 벌집이 되었을 거예요.”
몇 달 후 을미왜변이라는 국가적 참사가 일어나고 조선 주재 외교관들의 생활도 불안하고 힘들어졌다. 아내를 잃고 목숨의 위협 속에 빠진 국왕을 돕느라, 그리고 일본 정부에 사건의 진상을 촉구하느라 공분과 동정이 들끓은 시간이었다.
“국왕께서는 잘 지내시지요?”
샐리가 물었다.
“공사관 생활에 적응하셨어요. 요즘은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보낸 사절단 일에 골몰하신답니다.”
유제니가 대답했다.
“국왕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에요. 남편 실 공사와 저는 어젯밤에도 그분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춘생문 사건이 성공했다면 우리 미국 공사관에서 그분을 모셨을 터이지요.”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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