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산의 울림] “여! 내가 잘못했어… 청소는 내가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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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산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5 06:31:00

한국 사람들이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는 나의 자랑만 가득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해야 할 말이 많아서이다. 이번에는 북한에서부터 부부였던 사람들이 죽음의 사선을 넘어 이 자유로운 땅에 와서는 무엇 때문인지 갈라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같은 탈북자로서 나의 생활 경험을 간단히 적어 본다.

내가 대한민국에 와서 해당 기관의 교육 과정 등을 마친 후에 처음으로 잠자리를 편 곳은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의 한 빌라였다. 우리 가족에게 임대해 줄 집이 나오지 않았다면서 나가서 잠시만 기다리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 목사님이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겠는가” 하면서 교회가 이용하려고 마련했던 집을 임시로 우리에게 내주었다.

북한에서 50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돈밖에 모르는 인정사정없는 사람 못 살 사회”라는 반(反)자본주의 선전에 깊이 찌들었던 이 공산 빨갱이의 고정관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과 배려였다. 아니, 어찌 보면 북한이 그리도 반대하고 부정하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우리 부부는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는 그날까지 몇 달 동안 날마다 새벽 기도로 시작해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첫날부터 무엇을 해서 벌어먹으며 살아가야 하겠는가를 많이도 고심했다. 50살이 넘은 나는 어디 가서 막노동을 뛰자 해도 쉽게 받아 줄 곳이 없었다. 아내 역시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나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였다.

2~3일쯤 고심하던 끝에 우리는 ‘북한식 순대’ 장사를 한번 해 보자고 생각을 모았다. 즉시 나는 전철을 타고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육류시장에 가서 돼지 두 마리 분의 창자와 피를 사 들고 와서 아내에게 당장 순대를 만들라고 했다.

일자리를 알아본답시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온종일 카드놀이를 하고 술까지 마시고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가 보니 집 안은 가관이었다. 일생 순대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은 없고 자기 어머니가 만드는 것을 한두 번 본 적이 있다는 아내가 동네에서 큰 그릇을 빌려다가 방안 가득히 벌려 놓았는데 방바닥은 큰 소라도 몇 마리 잡은 양 온통 피칠갑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순대 요리를 그것도 돼지 두 마리 분을 혼자서 다 하느라고 온종일 수고를 했을 아내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나는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하고 화를 내며 옆방으로 들어가서는 자리를 펴고 누워 버렸다.

▲2019년 9월 21일 탈북인들이 탈북인 한모씨 모자 아사 사건을 방치한 정부와 지자체에 항의하기 위해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는 구호 아래에 혈서를 쓰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새벽기도에 가느라고 4시45분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려서 깨어나 보니 아내는 그때까지도 순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난감한 표정과 함께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왜 그래?”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이 “순대 밥을 다 넣고 가마에 앉힌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순대가 몽땅 터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큰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창자 한두 개만 남고 모두 터져서 순대 죽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순대가 익어 갈 때는 신경을 써서 참대 꼬챙이로 침질을 잘 해 주어야 하는데 잠을 잤으니 남아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쭝해서 내 눈치만 살피며 구석에 서 있는 아내 앞에 나는 솥뚜껑을 휙 던지며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해? 다 퍼다가 오물통에 버려!” 하고 빽 소리를 지르고는 성경책을 들고 새벽기도에 나갔다.

그런데 목사님의 그날 설교는 신통하게도 지금까지 ‘가정의 독재자’로 군림하며 살아온 나를 겨냥하고 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나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성경의 에베소서 5장 24~28절을 놓고 진행한 그날 설교는 그후 나의 남한살이 인생관을 확 바꾸어 놓았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들어간 나는 내게서 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여! 내가 잘못했어. 좀 쉬어, 청소는 내가 할게.”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무엇 때문인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돌아서서 슬피 울었다. 나는 그때 아내 앞에서 내 일생 처음으로 하기 힘든 말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 2006년에 영어학원을 열었다. 또 돈을 모아 북한에 있던 딸아이를 데려왔고, 2010년에는 수학학원도 열었다. 나는 아내를 학원 원장으로 내세워 주었고, 빨간색 승용차도 하나 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자식들도 모두 남부럽지 않게 키워 놓았다.

우리 부부는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는 우리를 받아 주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대한민국에 항상 감사하며 산다. 또 부족한 우리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준 하나님께 항상 영광을 드리며 오늘도 남은 생을 열심히 산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김태산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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