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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떠나 체코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망명 의사를 밝힐까 하고 한 달 남짓 고민했다. 하루는 큰마음 먹고 저녁에 술을 한잔 마시며 조심스럽게 망명 얘기를 꺼냈다. 아내는 펄쩍 뛰었다. 가겠으면 혼자 가라는 것이었다.
6년 전 나와 함께 말레이시아에 나갔을 때도 아내는 내가 평양에 회의하러 들어갔다가 잡혀서 노동자로 강직당하는 바람에 아들과 함께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6개월 동안 외국에서 온갖 부끄러운 수모를 다 받아 본 경험과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에 있는 두 아이와 부모·형제들 때문에 나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동안의 노력 끝에 아내를 설득시켰다.
우리는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경기를 TV로 몰래 보면서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보려고 두 번이나 주(駐)체코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매번 여성이 전화를 받기에 인사만 하고 끊었다. 한국에 와서 조사를 받으며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국가정보원에서 체코에 알아보고는 대사관 직원의 가족이 영사부에서 일하며 그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프라하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직접 들어가 보려고 두 번이나 갔지만 현지 경찰이 지키고 있고 또 북한 대사관이 너무 가까이 있기에 되돌아섰다.
날은 계속 지나가는데 보위원은 공로를 세우려고 우리 가족을 집중 감시했고, 여러 가지로 망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조건들이 계속 나를 압박했다. 글 몇 자로 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에는 하찮게 생각했던 일들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를 빨리 대한민국으로 보내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
나는 드디어 보위원과 통역들을 멀리 보내 놓고 9월9일에 망명할 결심을 했다. 9월9일은 북한 명절이다. 그날엔 해외노동자들도 충성 선서를 한다. 그런데 체코의 5개 지역에 널려 있는 노동자들이 한곳에 다 모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보위원과 통역들에게 각 공장에 나가서 9월9일에 선서 모임을 해 주고 오라는 핑계로 모두 내보냈다. 보위원이 가야 할 곳은 제일 멀고 처음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데려다주기로 했다. 회사의 사장이며 당 세포비서인 나의 결정에 그들은 따라야만 했다.
드디어 9월7일 오후 통역들을 다 내보낸 다음 나는 보위원과 함께 기차를 타고 멀리 있는 부직포 공장으로 갔다. 보위원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채 그저 좋아했다. 우리는 오후5시가 넘어서 노동자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 보위원을 소개시키고 보관해 두었던 낚싯대를 가지고 그리 멀지 않은 호숫가로 낚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여성 노동자 두 명이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호수로 갔다. 아마 보위원이 따라가 보라고 임무를 주었던 것 같다.
9월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낚싯대를 드리웠는데 왠일인지 그날 따라 물고기가 입질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차츰 지루해 오던 중에 크게 입질이 와서 낚싯대를 훅 추켜올리니 물고기가 물려 있었다. 옳거니 하고 조심스럽게 줄을 감아올리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리 큰 힘을 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낚싯대의 허리가 툭 부러진 것이다. 낚싯대가 부러지면 흔히 제일 약한 초릿대가 나가는데 굵은 허리가 나가는 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끼를 문 물고기라도 건지려고 줄을 당기는데 물고기마저 툭 떨어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나는 기분을 확 잡치고 말았다. 그래서 부러진 낚싯대에 줄을 감아 풀밭에 휙 던지며 여성 노동자들에게 “재수 없다. 나는 본사로 돌아가겠으니 너희들은 들어가서 보위원에게 내가 돌아갔다고 전하라”고 하고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도중에 보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인가? 자고 내일 간다고 하고는 왜 혼자 가는가” 했다. 나는 “낚싯대도 부러지고 잠자리도 별로여서 돌아가니 일을 보고 천천히 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참 걸어서 역전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역에선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마지막 열차가 있었다. 열차는 내가 오르자마자 출발했다.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체코에는 지방을 연결하는 간이 철도에 심야 열차가 없다. 조금이라도 늦어서 그 마지막 열차를 못 탔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 이 글을 못 쓰게 되었을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되었을 무렵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자고 온다더니 웬일인가?” 하고 놀랐다. 나는 말없이 술을 두어 컵 마시고 잤다. 그것이 내가 체코에서 자는 마지막 밤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에게 어떤 불행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였다….
다음날인 9월8일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무조건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몰려들었다. 그래서 잠자는 아내를 깨워서 남조선행 비행기표를 당장 예약하라고 했다. 아내는 “내일 떠난다더니 왜 이러는가?”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빨리 움직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는 아침 9시에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선서 모임을 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치 우리 가족 셋을 위해 남겨 놓기라도 한 듯이 좌석이 딱 세 개 남아 있어서 다행히도 예약은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앉아야 한다고 아내가 말했다. ‘어떻게 꼭 세 자리가 남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니 그때는 나도 아내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울고 있는 아내와 막내딸을 이끌고 9월8일에 체코를 떠나 독일을 거쳐 9월9일에 무사히 자유로운 땅에 안겼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가 계획했던 대로 9월9일에 체코를 떠나려 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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