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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아침에 잠을 깬 나는 9월9일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 떠나야 한다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와서 잠자는 아내를 깨웠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당장 오늘 남조선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라고 과업을 주고는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김씨 가문에 바치는 마지막 충성 선서를 했다.
노동자들에게 내가 프라하대사관에 올라가니 사고 없이 명절 휴식을 잘하라고 마지막 과업을 주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내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잠자는 막내의 얼굴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내가 “비행기 표 어떻게 됐어?”하고 물으니 아내가 기막힌 답을 했다.
아내가 여행사에 전화를 하니 오늘 남조선행 비행기 좌석 중에 마침 꼭 세 자리만 남았다고 해서 겨우 예약은 했단다. 그 세 자리는 마치 우리 가족 셋을 위해 마련된 자리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리들이다 보니 세 명이 뿔뿔이 갈라져 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오직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아내에게 네 살짜리 막내딸을 깨워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사진첩만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말하고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도 모든 것을 평상시 그대로 해두고 우리는 프라하로 갔다.
프라하비행장 매표소에서는 다행히도 아무 의심 없이 비행기 표를 내주었다. 그러나 한국 비자가 없이 북한 여권을 소지한 우리가 검색대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걱정으로 머릿속이 아뜩했다. 여권 검색에서 걸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단 트렁크 하나는 짐으로 부치고 드디어 여권검색대에 다가갔다.
최대한 겸손히 웃으며 인사를 하고 하회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불과 10초 사이인데 수십 년 같이 느껴진 것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알지 못할 감정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검사원이 아무 말 없이 통과 도장을 쾅쾅 찍더니 오히려 웃으면서 “긋 바이” 한다.
그렇게 체코에서 독일로 갔다. 당시에는 프라하-서울 직행 노선이 없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타고 온 비행기에서 내려 기다림칸으로 들어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안에 거의 모두 조선 사람들만 있는 것이다. 꼭 우리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 40분 이상 불안한 시간이 지나고 루프트한자의 탑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권과 비행기 표를 또 대조하는 것이었다. 숨이 컥 막혔다. 애써 편안한 표정으로 다가서서 여권과 비행기 표를 넘겨 주며 한 가족이니 자리를 좀 합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여권을 보던 여직원이 우리 여권을 옆 사람에게 넘겨 주며 좌석을 모아 주라고 했다.
1분여 동안 옆에 서서 컴퓨터를 다루는 여직원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왜 저렇게 느린가?’ 하는 원망이 막 솟았다. 그러다가 여직원이 드디어 우리에게 여권을 넘겨 주며 좌석을 합쳤으니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비행기에 타고 보니 다행히도 승강장 문 쪽에 있는 맨 앞자리여서 아주 편한 자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행 루프트한자를 10시간 이상 타고 한잠도 못 자고, 말 한마디 없이 정든 고향과 그리운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또 그렇게 2002년 9월9일 일요일에 드디어 50년 동안을 원수라고 욕만 하던 남조선 땅 인천공항에 몸을 내렸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내려서 온 가족이 오도 가도 못 하고 한 시간 이상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무관심 속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해 보니 그 안타까움과 적막감 또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다 못해 “평양에서 왔다”고 자진 신고를 했더니 미친놈 취급을 하며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국가정보원 조사를 받는데 자꾸 다른 여권과 비행기 표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아니 비행장에서 여권과 비행기 표를 다 주지 않았습니까” 하고 계속 같은 답을 했더니 비자도 없이 북한 여권을 가지고는 절대로 남한 땅에 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는 아주 쉽게, 무서울 정도로 아주 묘하게 되도록 만들더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하느님을 접하고야 이 모든 일이 하늘의 섭리고 뜻이었다는 것을 나는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더욱 깜짝 놀랄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조사가 거의 끝나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은 앞면에 검은 유리가 달린 취조실에 국정원 직원이라 짐작되는 사람 3·4명과 마주 앉았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묻는다며 “김 선생님! 정말 모르고 왔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 뭣을 자꾸 모르고 왔는가를 묻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그러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더니 “선생님이 여기 도착한 다음 날 선생님을 대신할 사장과 재정 담당 한 명, 그리고 선생님을 데리고 나갈 사람 두 명 등 모두 4명이 프라하 비행장에 내렸습니다. 북한 대사와 보위원이 비행장에 마중을 나갔습니다”고 했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서 한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기를 강제로 끌고 왔다고 삐쳤던 아내도 말을 못 하고 아연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평양에서부터 그런 기적들이 연달아 일어났겠는가? 하루만 늦었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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