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산의 울림] 과연 내 힘으로만 대한민국에 정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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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으로의 망명 이야기 <4>

김태산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17 06:31:00

대한민국에 입국한 지 20여 일 만에 마침내 조마조마했던 국가정보원 조사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조사관이 말했다. “김 선생님! 다른 탈북자들은 나이가 젊어서 걱정 없는데 선생님은 연세가 있으므로 취직이 어려울 텐데 도움을 못 드려 미안합니다.” 나는 “괜찮다”고 답을 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받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하나원을 거쳐 드디어 자유로운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3중 4중의 통제와 감시가 항상 따라다니던 북한에서의 50년 삶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면, 아무런 통제도 감시도 없는 한국의 자유가 그렇게도 인간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담당형사 소개로 산 핸드폰 입력 번호란에는 아내와 담당형사 전화번호 달랑 두 개뿐이다.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가면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도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 출근을 안 한다고 찾아오는 경찰도, 보위원도 없다. 아침마다 마당 청소 나오라고 문을 두드려대던 인민반장도 없다. 생활총화·강연회 오라고 툭하면 불러대는 정치 조직도 없다.

오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오직 국가와 당에서 시키는 일에만 숙달된 몸이다 보니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런 데다 밤새 술을 퍼마시고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퍼마셔도 누구 하나 탓하는 자가 없다. 내가 죽든 말든 무관심한 사회가 바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였다.

그렇게 인간이 점점 나태해지고 정신·육체적으로 타락해 갔다. 그런데 그때 우리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주변 교회 일꾼(전도사)들이다. 평양에 두고 온 자식들 걱정에 울기만 하던 아내는 그들을 따라 매일 아침 새벽교회에 다니며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나도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애들을 데려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식하다고 비웃겠지만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목사의 도움으로 드디어 아내는 가정방문 영어교사로 취직했다. 나는 취직을 해보려고 벼룩시장 신문을 아무리 뒤져도 이북에서 온 데다 나이가 많다고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인력사무소를 통해서 건설판과 건물 철거하는 일을 닥치는 대로 따라다녔다. 정말 힘들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일이 전북 익산시 함열채석장에서 돌 캐는 일이었다. 집을 떠나 채석장 현장숙소와 함바에서 자고 먹으며 돌가루에 묻혀 1년을 지내다 보니 인간의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유로우니까 마음만은 편했다.

북한에서처럼 수령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돈을 벌어 자식들을 데려오겠다는 그 한 가지 생각이 우리의 목적이고 소원이었다. 그렇게 한 3년간 육체를 마구 굴렸더니 무릎이 붓고 아파서 더는 일을 하기 힘들었다. 그런 데다 평양에 있는 애들을 데려올 선마저 끊어져 막막했다. 여기에서 우리의 소원과 미래가 끝나는가 싶어 절망했다.

그런 속에서 힘없고 나약한 인간들이 매달릴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매일 새벽기도를 간다. 나도 이불 속에서나마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3년간 악착스럽게 모은 돈이 70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다가 처음에는 작은 식당을 해 볼까 했다. 그러나 요리 경험이 전무한 우리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평양 외국어대 졸업생인 아내를 믿고 영어 학원을 차리기로 했다.

한솔교육의 프랜차이즈를 하려 했는데 한솔교육 본사와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반대했다. 겉으로는 좋은 말로 반대했지만 “무식한 탈북자 주제에 한국 애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냐?” 하는 일종의 비이냥이었다.

나는 끝내 본사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 양천구 목동 인근에 건물을 얻어서 교실 5개와 사무실·상담소를 가진 작지 않은 학원을 세우고 2006년 6월 말 드디어 문을 열었다. 아내는 교육을 담당하고, 나는 노란색 중고 버스를 구입하여 직접 운전을 했다.

나는 지금도 누가 물어보면 힘들게 학원을 운영했다고 꾸며서 말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하게 도와주었다. 물론 아내가 가정교사를 하며 쌓은 인맥도 있었지만 요행히도 학원은 두 번째 달부터 수익 구조에서 플러스를 기록했다. 그리고 6개월이 되자 학생 수 100명을 돌파했다. 이어 학생 수가 200명을 넘어 교사를 4명 이상 써야 했다. 매년 본사에서 진행하는 실적 총화 때마다 1등을 해서 상금과 해외여행권까지 나왔다. 아내는 한솔교육 학원 원장들을 재교육하는 강사로도 활약했다.

학원가에서는 탈북자인 우리가 운영하는 학원의 실적이 탑에 오르고, 본사에서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교재 내용과 교육 방법을 바꿀 것은 바꾸어 나갔다. 그런 데다 평양 길이 열려서 인민군 고사포부대에 입대했던 맏딸도 무사히 데려다가 가톨릭대 간호학과를 졸업시켰다. 막내딸은 내가 데리고 외국에 나가 5년간 유학까지 시켰다.

나는 이 글로 종교나 믿음을 선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 편히 살던 내가 인생 후반에 자유 대한민국으로 와서 정착 과정에 겪었던 사실을 전할 뿐이다. “하늘은 항상 선하게 노력하는 자들의 편에 있더라.”

김태산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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