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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제법 내리던 날이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이면도로를 걷고 있었다. 엔진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차 한 대가 뒤에서 따라붙고 있었다. 그르렁대는 소리로 보건대 트럭 종류가 틀림없었다. 본능적으로 차를 피하면서 내 눈길은 땅바닥을 향했다.
도시의 배수 구조가 강우량을 커버하지 못해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나의 예상대로라면 그 차는 물웅덩이를 가로질러 나에게 막대한 양의 물을 튀길 것이었다. 새로 꺼내 입은 나의 바지는 누런 흙탕물로 범벅이 될 터였다. 괜히 밝은색 하의를 입었다는 찰나적 후회가 뇌리를 때렸다.
엔진 소리는 점점 커졌고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트럭은 나의 발걸음과 거의 유사한 속도로 아주 느리게 지나갔고 흙탕물은 한 방울도 튀어오르지 않았다. 차는 도로의 물을 한껏 천천히 짓이긴 후 내 시야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고마워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타인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 엑셀러레이터를 밟지 않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줄 수 있다. 버스·지하철 안에서 통화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기분을 지켜줄 수 있다. 남의 험담을 삼가면 자신과 타인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삶은 냉담함(Apathy)과 연민(Pity) 사이에 놓여 있을 때 가장 평화롭다. 연민을 겉으로 드러내면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 되지만 내면화시켜 차갑게 얼리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된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은 셀럽이 쓰는 것이다. 셀러브리티는 대중적 관심의 자장 안에 있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가 화제가 되고 뉴스가 된다. 좀 야단스럽게 선행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따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답시고 어줍잖게 나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보통 사람 최고의 스킬은 자신을 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모르는 척 냉담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냉담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행동반경을 줄이고 흔적을 지우는 것.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 침을 뱉지 않는 것. 이번에 탑승한 생을 조용히 지나는 것.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는 따뜻한 냉담함이 최고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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