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0º
습도 85%
제주 12º
습도 75%
)
안 지가 꽤 되는데도 좀처럼 친해질 기회가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그랬다. 환경과 생태에 관심이 많아 되도록 일회용품을 안 쓰고, 먹다 남긴 음식은 꼭 싸 들고 오는 버릇까지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심지어 농담 코드도 잘 맞아서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늘 즐겁게 지내곤 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파하고 나면 따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일은 없었다. 오랜 세월 우리는 평행선 같은 우정(?)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이럴 때 지인이라는 편리한 표현을 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그 기회란 것이 찾아왔다. 몇몇이 떠난 여행길에서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된 것이다. 폭설 속의 도시를 떠나와 모처럼 안정되고 편안한 시간을 맞이한 터였다. 차창 밖으로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고 KTX 객실 안은 따뜻했다. 그래서 문득 너그러운 마음이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거의 처음이다시피 그녀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열차가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매슬로가 말한 3단계 욕구(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배반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하위 욕구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는 인간이 거역하기 힘든 매우 기초적인 욕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소속의 욕구’ 정도는 거부하고 살아도 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냈다. 그 욕구가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그 욕구를 통제할 가능성에 대해.
그녀도 같은 생각이어서 그동안 겪었던 관계의 감옥에 대해 털어놨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관계’에 대해, 사람 그 자체가 아닌 관계가 주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았다. 우리는 너무도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 속에 오래 섞여 있으면 갑갑함을 느끼고, 혼자 있는 시간의 총량이 부족하면 불안이 찾아오고, 새로운 만남에 소극적인 것까지…. 심지어 ‘외로움’이나 ‘심심함’ 같은 감정을 거의 못 느끼고 사는 것까지 비슷했다. 같은 극끼리는 도무지 당기는 힘이 없단 말이지.
결론적으로 그날 우리는 조금 친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좀 더 편한 사이가 됐다. 이 말은 지금과 같은 느슨한 관계를 오래 유지해도 된다는 데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에게 다가가려 애쓰지 않을 것이며 느슨한 관계들이 그렇듯 배신이나 질투는 끼어들 틈이 없는 견고한 우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1
좋아요1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