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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심했다는 첩보가 평양성에 당도했다.
보장왕은 매우 놀라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불렀다.
“당나라가 드디어 쳐들어올 모양이오.”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안심시킨다.
“이미 예견했던 일입니다. 전략을 구상해 두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전략을 들어 봅시다.”
“요하를 1차 방어선으로 하되 신성과 요동성·안시성·건안성에 군사를 중점 배치하여 대항하고, 전쟁의 흐름에 따라 군대를 추가로 파견하여 지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막강한 우리 해군을 내보내 제해권을 장악하면 당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러갈 겁니다. 그때 출격해서 섬멸하면 됩니다.”
연개소문의 거침없는 답변에 보장왕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저들의 병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보장왕이 다시 물었다.
“우리의 병력이 저들에 비해 너무 적지 않소?”
국왕의 우려에도 연개소문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현재 우리는 정예병만 30만이 넘습니다. 게다가 경당 조직을 통해 훈련된 많은 수의 장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보장왕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전쟁에 필요한 병장기는 충분하오?”
“오래전부터 철산에서의 철 생산량을 크게 늘려 왔습니다. 이를 이용해 철제 병장기와 새로 개발한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해군의 전력은 어떻소?”
“압록수 하구에 있는 조선소에서 주야로 병선을 건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조선소 증설 공사도 진행 중입니다. 필요한 목재는 백두산에서 벌목하여 물길로 압록수 하구까지 나르고 있습니다.”
보장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남쪽의 신라가 이 틈을 이용해 도발해 오지 않을까 걱정이구려.”
“백제와의 동맹을 보다 강화하지 않았습니까. 백제가 압박하고 있으니 신라도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북방이 문제가 되겠구려. 당나라에 굴복한 돌궐족이 이번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한다는 첩보가 있지 않았소. 거란족의 일부도 당군과 함께 움직일 게 아니오.”
보장왕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연개소문도 걱정하는 바였다.
한때 막북(외몽골)을 장악했던 돌궐족이 이 당시에는 당나라의 속민(屬民)이 되어 손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거란족도 당과 협력하며 고구려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막리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의 말씀처럼 선대왕 때와는 달리 돌궐족과 북방의 여러 부족이 당나라로 기울어 있습니다. 오로지 말갈족만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돌궐을 제외한 다른 부족들은 아직 우리 편으로 돌아설 여지가 있으니 계속 사신을 보내 회유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막북의 지배자인 설연타에게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자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보장왕은 비로소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이렇게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당군 또한 수군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궁궐에서 돌아온 연개소문은 책사 도수금과 아우 연정토, 그리고 고정의(高正義)·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고돌발(高突勃) 등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장군들이 좌정하자 연개소문이 입을 뗐다.
“당주가 곧 고구려 원정에 나설 거요. 과거 수양제가 그랬듯이 주력군을 요동으로 보내리라 보오. 이를 어찌 대처하면 좋을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소.”
북부 욕살 고연수가 의기양양하게 나섰다.
“우리는 서방의 제국들과 수없이 싸웠지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습니다. 수적 열세에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합지졸인 적군에 비해 전투력이 월등히 뛰어난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군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우리 군대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남부 욕살 고혜진이 옆에서 거들었다.
“당주가 얼마나 많은 군대를 끌고 올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충분히 대비했습니다. 그동안 경당을 활성화하여 전력을 크게 향상시킨 만큼 저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연개소문이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고연수·고혜진 두 욕살께서는 착각하지 마시오. 당주 이세민은 양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요. 우리가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돌궐을 평정했고 거란·신라 등 우리를 둘러싼 나라를 포섭하여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소.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간계가 뛰어난지 알 수 있소. 함부로 상대를 깔보다가는 큰코다치기에 십상이오. 아시겠소?”
연개소문의 훈계에 두 사람은 머쓱해졌다. 그동안 대막리지의 심복이라 자부해 왔건만 사람들 앞에서 핀잔을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대로 고정의가 맞장구를 쳤다.
“대막리지의 말씀이 맞소. 이세민을 양광과 동일 선상에 놓았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오.”
연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대로께서는 방책이 있으시오?”
고정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예전에 을지문덕 장군께서 쓰셨던 계책이 있습니다. 청야전술을 펼치면서 성을 굳건히 지키는 지구전(持久戰)으로 승부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소부대 단위로 요서에서 유격 전술을 펼치는 겁니다. 불시에 당군을 기습해 양곡 보급선을 끊으면 이세민이 제아무리 병법의 대가라 해도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대막리지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고정의는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답게 노련했다.
도수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연개소문을 쳐다봤다.
“뱃길로 군량을 운반할 수 있다는 점도 살피셔야 합니다.”
“물론이오. 빈틈없는 이세민이 바닷길을 간과할 리는 없을 거요. 그래서 비사성에 있는 온사문(溫沙門) 장군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지시해 두었소.”
연개소문도 당 태종 못지않게 빈틈이 없었다.
대사자 연정토가 말을 꺼냈다.
“저들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장 요서 지방을 공격하는 겁니다.”
도수금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좋은 생각입니다. 일단 유성에 군대를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의 허실을 알아볼 기회가 될 겁니다.”
요서의 유성은 영양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됐으나 영류왕이 주둔 군사를 퇴각시킨 후에는 당나라가 영주부를 두어 관장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연정토의 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장군들은 예하 부대 및 각 성에 파발을 보내 전시 태세로 전환케 하시오. 각 군과 경당에 병장기를 수리하고 1년치의 양곡을 저장하라 이르시오. 전쟁에 대비함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회의가 끝나자 대막리지는 고돌발을 따로 불렀다. 그는 연개소문을 오랫동안 모셔온 심복으로 성실하고 강직한 성격이었다.
“너는 당장 신성으로 가라. 그곳에서 회원진·통정진·영주·임유관 등의 정보를 수집해 내게 알려라. 그리고 3개월 후에 내가 기별하면 요서 지역을 공격해라.”
고돌발은 대막리지의 밀명을 받고 요동의 신성으로 떠났다.
연개소문은 책사 도수금에게 명해 왜를 비롯하여 말갈·실위·거란·해족·철륵·사마르칸트(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 주변국에 일제히 사신을 파견했다. 당 태종의 무도함을 알리고 고구려 편에 서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결전을 차질 없이 준비해 나갔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신성에서 첩보가 날아왔다. 당나라 장수 장검(張儉)이 군사를 이끌고 유성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곧바로 보장왕을 찾았다.
“드디어 당나라 군대가 요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당장 군사를 파견해서 저들의 전력을 탐지해야 합니다.”
보장왕은 두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대막리지는 즉시 신성에 있는 고돌발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기(步騎) 3천을 차출해 유성을 공략하되 적당한 시기를 봐서 후퇴하라. 그 후에 장차 있을 격전에 대비해 거점을 확보하고 군사들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요소마다 배치하도록 하라.”
명을 받은 고돌발은 철기병 1천과 보병 2천을 뽑아 요하를 건너 유성으로 나아갔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유성 앞에 도착한 고돌발은 성을 지키고 있는 당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당군들은 느닷없이 고구려군이 나타나자 크게 긴장했다. 그러나 그 수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자 안심하고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군 무리 가운데 한 장수가 나와 외쳤다.
“나는 당나라 장군 장검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땅을 침범했느냐?”
고돌발이 코웃음을 쳤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우리 고구려의 땅이다. 남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거한 것은 너희다. 죽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거라!”
장검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누가 저놈의 버릇을 고쳐 주겠느냐?”
아장 하나가 용감하게 뛰어나가 싸웠지만 고돌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불과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날카로운 칼날에 목이 달아났다.
고돌발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수하들의 실력이 형편없구나. 우두머리가 직접 나서라!”
약이 오른 장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나가 고돌발과 겨뤘다. 하지만 그 역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장이 자꾸 뒤로 밀리자 당나라의 장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몰려나왔다. 고구려 군사들도 이에 맞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당군이 밀려났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장창에 찔려 쓰러지거나 말발굽에 채여 넘어졌다.
싸움이 시작된 뒤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많은 당군의 시체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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