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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前보건복지부 장관 긴급 시국 제언 <2>
[최광 칼럼] ‘國富論’ 펴낸 아담 스미스보다 2400년 전 ‘부국안민 경제학’ 확립한 명재상 관중에 배우자
40년 간 제나라 재상 재임하며 경세제민·부국강병에 올인
난세의 바이블 ‘管子’ 집필… 826년 후학 제갈량의 師表
공자 “관중이 없었으면 우리는 야만족 풍속 못 면해” 극찬
최광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8 11:26:41
 
▲ 최광 대구대 석좌교수·前보건복지부 장관
관중(管仲·기원전 725?~645)은 관포지교(管鮑之交)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倉庫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라는 말로 잘 알려진 명재상으로 재상 취임 후 불과 몇 년 만에 제()나라 환공(桓公)을 춘추시대의 첫 패자(覇者)로 등극시킨 인물이다. ‘열국지(列國志)’ 묘사에 따르면 관중은 용모가 걸출하고 총명이 출중했다고 한다. 널리 고금 서적에 통달하고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세상을 바로잡고 시대를 구제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위치한 제나라는 당시 후진국이었다. 군주 환공 역시 평범하였기에 국정은 어지러웠다. 관중은 어려서부터의 죽마고우(竹馬故友)였던 포숙아의 천거로 환공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포숙아와 관중이 벼슬길에 올랐는데 포숙아는 뒷날 환공이 된 소백(小白)의 측근이었고, 관중은 소백의 형인 규()를 섬겼다. 규와 소백 형제 간의 권력 다툼에서 형이 패해 동생이 승리하고 환공으로 즉위하자 형의 편에 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처단하려 했다.
 
이때 포숙아가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났습니다. 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합니다라고 환공에게 진언했다.
 
포숙아가 환공에게 관중을 천거하며 자신이 관중만 못한 다섯 가지 이유를 1. 백성에게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어 백성을 사랑하는 것, 2.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강을 잡는 것, 3. 충성과 신의로 제후와 동맹을 맺는 것, 4. 예를 제정하여 천하에서 본받게 하는 것, 5. 갑옷을 입고 북채를 잡고서 군문(軍門)에 서서 백성들을 모두 용맹하게 하는 것 등으로 열거하였다. 포숙아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친구와의 우정이 절절이 넘쳐난다. 이어 포숙아는 관중은 백성의 부모입니다. 장차 자식 같은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백성의 부모, 즉 관중을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까지 호소했다.
 
포숙아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듣고 마침내 환공은 관중을 재상에 임명하기로 결심한다. 환공은 관중을 맞이하기 위해 세 번 몸을 씻고 세 번 향에 몸을 쬐었다. 이른바 삼흔삼욕(三釁三浴)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환공은 관중을 존경하는 뜻에서 중부(仲父)라 부르도록 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먼저 중부에게 고한 후에 자기에게 알리도록 하고, 모든 일은 중부의 사전 결제 맡도록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거두어 주지 않으면 인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큰 인재는 반드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으로 나온다. 관중에게는 포숙아가 있었고 그리고 환공이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도자와 참모가 등장하였고 그들에 의해 참으로 새로운 위대한 역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중 자신은 포숙아에 대해 나는 일찍이 세 차례나 벼슬길에 올랐으나 세 번 다 군주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포숙아는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때를 못 만났다고 이해해 주었다. 나는 일찍이 세 번 전쟁에 나가 세 번 다 도주하였다. 그런데 포숙아는 나를 비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고 자백하였으며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라고 회상했다.
 
시스템 경영의 최고 노하우를 보여주는 경세의 바이블 관자(管子)’의 필자는 관중에 한정되지 않는다. 1. 관자 자신, 2. 관자의 문인 또는 제자, 3. 제 나라가 전국시대 뛰어난 학자들을 초청하여 머물게 한 직하학궁(稷下學宮)의 학자들 등이 공동 저자로 거론된다. ‘관자가운데 경중등 여러 편이 서한(西漢) 시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관자700여 년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집필되었다. 원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네 분의 교수에 의해 번역된 관자106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관포지교를 통해 관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만 관자라는 고전을 읽어본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관자국가 경영이라는 큰 목적을 위해 정치·경제·행정·법률·철학·군사 등 제반 분야에서 요구되는 지식을 집성해 놓은 국가 경영의 백과전서이다. 최근 이전에는 관자에 대한 일본의 연구수준이 중국보다 높았다고 하며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것은 난세의 바이블로 통하는 관자를 깊이 탐사한 덕분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관자 정치사상의 진수는 목민에 있다. ‘관자는 모두 24권인데 제1권이 정치의 근본 원리인 목민을 다루는바 이는 국송(國頌·나라를 다스리는 법사유(四維·() () () () 네 가지 강령사순(四順·민심이 원하는 네 가지를 채워주는 정치십일경(十一經·나라를 다스리는 열한 가지 원칙육친오법(六親五法,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가지 법도와 다섯 가지 방법)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와 요령에 대해 날카롭고 체계적이고 종합적이고 현실적인 통찰에 탄복할 뿐이다. 오늘날의 지도자들도 이 목민만 읽고 실행하여도 부국안민 태평성대가 전개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목민이란 말도 사실은 관자의 첫 번째 권 목민에서 유래된 것이다.
 
관중은 가지려거든 먼저 주어라. 이것이 정치의 비결이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국정관리 원칙을 하루하루 고되게 살아가는 자에게 예의범절을 논해 무엇하랴. 생활만 풍족해지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 군주가 재정 면에서 무리한 일을 벌이지 않는 것, 이것이 민생 안정의 근본이다. 생활이 안정되면 백성도 자연히 예치를 준수한다. 이를 먼저 헤아리지 않기에 나라가 멸망한다라고 잘라 말했다.
 
관중이 강조한 목민의 핵심은 사순(四順) 네 개의 따라야 할 강령에 있다. “백성들이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군주는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 백성이란 가난과 비천함을 싫어하니 군주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줘야 한다. 백성들이란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군주는 그들을 보호하거 안전하게 해줘야 한다. 백성이란 자신이 죽고 후대가 끊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군주는 그들의 수를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화육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백성을 받드는 관중의 애절함이 넘쳐난다.
 
관중이 추구한 것은 유가와 같이 이상주의자의 공허한 유토피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비자의 법가와 같이 무자비하고 냉혹한 현실주의자도 아니었다. 이상을 간직하면서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대안을 모색하였다. 관중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도덕의 이름 아래 거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의 이익 추구 본성에 기초하여 정치경제사회를 이끌어 갈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놀랍게도 오늘날 주류경제학과 똑 같은 인식과 방법론에 의거하여 세상과 국가를 인식하였다.
 
기원전 685년에 재상에 올라 기원전 645년 현직에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재임하면서 관중은 경세제민과 부국강병에 올인했다. 경세가로서 관중의 출중함은 기본 원리에 충실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단들을 정치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바다에 접한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고,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력을 키우고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제 나라를 춘추시대의 첫 패자(霸者)로 등극시켰다. 백성들과 도락을 함께 하였고,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일도 복이 되게 하였고, 실패할 일도 잘 처리하여 성공으로 이끌었고, 법도에 따르는 것을 중시하였고, 일의 경중을 따지는 데는 세밀하고 신중하였고, 그 결과 중국 역사 상 가장 훌륭한 명참모로 칭송되어왔다.
 
국가의 부를 중시하는 부국(富國)이냐 아니면 백성의 부를 중시하는 부민(富民)이냐 하는 문제는 유가와 법가 사이의 중요한 논점이었다. 대체로 법가는 부국을, 유가는 부민을 우선시 한다. 그러나 관자는 양자를 모순이나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부민을 통한 부국을 추구하였다. 관중이 살던 시대는 학술계가 제자백가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시대였다.
 
제자백가의 효시가 바로 사상 최초의 정치경제학자인 관중이었다. ‘관자속에는 훗날 제자백가로 발전하는 다양한 사상이 포괄되어 있어서 고대 학술과 사상의 백과전서를 이루고 있다. 관자경제학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경제를 정치 및 군사와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한 데 있다. 유학이 정립되고 성리학이 등장하면서 관자는 완전히 사장되다시피 했다. ‘관자는 한때 오랫동안 사대부들에게 일종의 금서(禁書)로 여겨졌다.
 
관중의 부국안민책의 핵심은 인치와 법치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 백성의 생업기반을 잡아주는 것, 행정과 군사편제를 결합시키는 것, 국제정치의 기준을 세우는 것, 정당한 욕망을 긍정하고 채워주는 것, 지방조직을 완비하는 것, 책임정치를 실시하는 것, 시장을 자율에 맡기는 것에 있었다. 경제를 중시하고 국제 외교에도 능숙했던 대단히 실용주의적 정치인이었다. 그는 경제정책의 성공을 기초로 제 나라의 국력을 키워서 국제 외교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국을 이민족의 침입에서 구출한 성공한 정치인이자 유능한 경영자였다.
 
관중은 전국 행정구역을 다섯 가구를 기초로 하는 군사행정 편제 즉 오가연병제(五家練兵制)로 재편하여 경제 진흥에 주안을 둔 부국안민에 힘썼다. 국가가 권력을 휘둘러 백성을 핍박하기보다는 사농공상의 분업·시장의 활성화·국제무역·농지개간·세제개혁 등으로 국가를 조직을 갖춘 생산자로 인식하여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토지에 따라 세금을 거두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을 금지하는 한편 염철(鹽鐵)업을 발전시키고 화폐를 주조했으며 물가를 조정했다.
 
관중은 지방체제를 개혁했다. 중앙이 군사조직이라면 지방을 생산조직으로 전환시켰다. 관중의 제안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바르고 명백하게제도를 정비하여 생산자들의 생산 의지를 북돋우는 것이었다. 그후에는 생산자들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요체였다. 제나라가 첫 번째 패자가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관중의 경제개혁 때문이다. 제나라는 산동의 평지와 바다를 개간하고 생산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당시 최고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주나라 시절과 춘추 전기의 정전제는 여덟 가구가 작은 생산단위가 되어서 협력 생산하는 체제다. 토지를 우물 ()’ 자로 구획하고 여덟 가구가 한 구획씩 차지한다. 나머지 남은 한 구획은 공전(公典)이라고 해서 조세 목적 토지였다.
 
관중은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을 확실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바 정전(井田)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하게 한다는 말이다. 사유재산권의 보장이 경제발전의 원천임을 오늘날에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2700년 전에 사유재산권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첫 번째로 관중은 국가를 조직을 갖춘 생산자로 인식했다. 국가는 커다란 상인이다. ‘관자의 경중과 관련된 각 편들의 핵심은 국가의 재정을 시장의 힘에 의해 관리하는 것이다. 관중은 상인들이 이 일을 한다고 보았다. 일단 국가는 십년 치 양식을 저축해 두어야 한다.”(‘관자구축). 재난에 대비할 양식을 갖추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세계 최초의 복지국가 이론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기 때문에 국가는 이익이 난다. 그 이익으로 모든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 흉년을 구제할 수도 있고 전쟁에 대비할 수도 있다. 재정이 탄탄해지는 것이다.
 
관중이 보기에 상인들의 역할, 한 지방에서 넘치는 것을 다른 지방에 공급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국가가 곡물을 사들이고 방출하며 곡가를 조절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또 상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돌아다니는 존재라고 말했다. 국가의 역할은 기근이나 숙황(熟荒·풍년으로 쌀값이 내려 농민이 도리어 곤궁해짐)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관자에 나오는 국가는 거대한 상인이다. 국가는 곡물·소금·철 등을 가지고 재정정책을 써서 이익을 얻는 동시에 물가를 조절한다. 국가는 큰 상인이지만 경제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상인이다.
 
두 번째로 관중은 국가를 조직적인 자원개발자로 보았다. ‘관자해왕 편에 다음과 같은 환공과 관중의 대화가 있다.
건물에 세금을 매기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럼 집을 헐게 됩니다.”
나무에 세금을 징수하면요?”
나무를 베겠지요
가축들에 징세하면요?”
새끼들을 죽일 것입니다.”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하면 어떨까요?”
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나라를 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재정을 확보할까요?)
오직 산과 바다를 관리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관자는 백성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 차라리 국가가 자원을 개발하여 재정을 확보하자고 말했다. 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철을 독점한다는 것이고, 바다를 관리한다는 것은 소금을 독점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정권들은 금속을 독점했다. (관중시대에는 구리)이야 당시에는 국가가 아니면 대규모 개발이 불가능하므로 자연적으로 독점이 되었다.
 
▲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명재상 관중(管仲).
관중은 지방 수령이 가장 중요한 책무로 각 지방에서 최고의 인재를 발굴 추천하도록 강조했다. 관중은 널리 인재를 천거하게 해서 활용했다. 세금은 덜 걷어도 다음 기회를 주지만 인재를 천거하지 못하면 바로 면책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제 나라의 지방인들 중에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발탁되었고 죄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벌을 받았다.
 
관중은 인사에 정통한 최고경영자(CEO)였다. 관중은 인물을 기용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인 잣대로만 보지 않고 능력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래서 설사 도덕적 결함이 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적재적소에 기용하였다. 그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설정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공정한 방법과 확고한 상벌 체계를 구축하고 시스템으로 조직을 이끌어 간 시스템식 경영의 지도자였다.
 
관중이 정치를 맡고 오직 공과 실력에 의해 사람들을 등용한다는 평이 나자 모두 실력과 공을 다투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관리들의 책임을 명백히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지위와 실력이 일치하는가? 지위에 비해 실력이 좋지 않으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실력이 출중하나 지위가 낮으면 승진해야 했다.” 이것이 관중의 원칙이었다. 공개적으로 추천하게 하지 않으면 매관매직인 성행하고 또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온다. 그래서 관중은 공이 없으면 친척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관중이 보기에 군주의 역할은 인재를 쓰는 것밖에 없다. 인재를 정확히 쓰려면 업적과 능력에 상관없이 특정인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을 이유 없이 총애하면 백 사람이 멀어진다는 것이 관중의 생각이었다.
 
관중은 자신의 부국안민 정책으로 경제를 크게 부강(富强)시키고 나라 전반의 기강을 반듯하게 세운 후 이를 바탕으로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질서를 재편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당시 중화(中華)’의 국제질서를 바로 잡고 국제정치의 기준을 새로 세웠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하여, 단 한 번에 천하를 바로잡았다.
 
이와 같이 한 번에 천하를 바로잡는다는 말이 일광천하(一匡天下)’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서 공자와 제자 자로가 환공과 관중을 언급하며 나온 것으로, 공자는 관중의 도움으로 환공이 존왕양이(尊王攘夷)란 기치로 많은 제후국들을 규합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오랑캐의 땅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제자에게 말하였다.
 
관중은 먼저 제 나라가 이전에 빼앗은 노나라·연나라 등의 땅을 돌려주며 이웃나라와 친하게 지냈다. 기원전 681년 환공은 송(((()와 회맹(會盟)을 갖고 역사상 처음으로 제후의 맹주 자리에 올랐다. 훗날 제나라는 연나라를 도와 산융족을 정벌하는 한편 7개 나라와 연합해 주나라 왕실의 내란을 해결했다. 기원전 651년 환공이 송나라의 규구(葵丘)에서 노(((((() 등과 회맹하여 맹약을 맺자 주()나라 천자는 사자를 보내 환공이 맹주임을 확인하고, 평화와 외교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각 나라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시키도록 축원했다.
 
제후들과 회맹하여 천자의 사자를 받아들이고 맹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환공의 마지막 회합이었다. 제후들과의 회맹이 모두 아홉 차례 있었는데 전쟁을 위한 회맹이 세 차례 그리고 평화를 위한 회맹이 여섯 차례였다. 역사에서는 아홉 차례 회맹을 구합제후(九合諸侯)’라 한다. 무력을 중심에 두지 않고 춘추시대 첫 번째 맹주로서 환공과 관중이 이룬 패업의 길은 후세 사람들이 모방하려고 했다.
 
춘추시대의 질서란 힘을 기준으로 하여 군사적인 무한경쟁은 배제하는 특이한 중화(中華)’ 국제관계 체제였다. 관중의 생각이 당시 중화 국제정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폭력을 떠나 아예 강약이 없는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강하면서도 나름대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차선일 수 있었다. 관중은 그 차선을 체계화한 인물이었다.
 
관중의 현실주의는 오늘날의 현실주의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고 인간적이었다. 관중은 힘이 있지만 스스로 황야의 무법자가 아니라 보안관이 되려고 노력했다. 관중은 개혁을 실시하고 패자가 됨으로써 가장 안전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었고 자신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다. 그래서 관중은 역사상 최고의 명참모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관중은 관리를 꼭 해야 하는 영역만을 관리했다. 그리고 관리가 필요한 영역에서도 반드시 관리할 수 있는 대상만을 관리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율에 맡겼다. 관중의 이론은 오늘날의 행정학과 재정학의 전제들과도 일치한다. 관중의 사고의 틀은 행정과 재정 그리고 정치를 전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시콜콜한 이론들보다 훨씬 포괄적이었다.
 
관중은 경제학의 시조로 일컫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보다 2400여 년 전에 부국안민의 경제학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자 세계 최초로 국가 재정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이다. ‘국부론(國富論)’을 집필한 스미스와 관자(管子)’를 쓴 관중을 비교해 보면, 첫째 사람에서 관중이 스미스보다 연대적으로 2400여 년 앞섰고, 둘째 직업에서 스미스는 명교수였고 관자는 명재상이었고, 셋째 공직에서 스미스는 영국의 관세청장을 역임한 반면 관자는 재상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의 고위직을 맡았으며, 넷째 저술 측면에서 스미스와 관자 모두 당대 최고의 불후의 명저를 저술했으나 성격이 다른 두 저서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 없으나 관자국부론보다 내용이 훨씬 포괄적이며, 다섯째 이론의 현실 적용면에서 스미스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 정책화시키지는 못했던 반면 관자는 자신 저술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종합적으로 보아 관중이 스미스보다 몇 수 위임에 틀림이 없다.
 
관중보다 826년 후에 태어난 또 다른 명재상 제갈량(諸葛亮)은 관중을 흠모하여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기를 좋아했으며 관중을 자신의 사표(師表)라 했다.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스스로 관중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관중에 빗댔다. 제갈량의 정치는 관중의 정치를 모법으로 했다고 했다. ‘사기(史記)’에서 사마천(司馬遷)관중이 등용되어 제 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제 나라 환공은 패자의 지위로 제휴들은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 잡았으니, 모두 관중의 지모 덕이다라 극찬하였다.
 
관중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데 마치 물이 얕은 곳으로 흐르듯, 관중은 언제나 백성의 뜻을 헤아리며 정책을 펼쳤다. 정책을 논의할 때면 실행에 중점을 두어 늘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폈다. 실패를 범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성공으로 이끌었고, 끊임없이 균형을 생각하여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것이 관중이 보여준 정치의 특징이다라고 했고 관중은 재상에 오르자마자 경제 관청을 설치하여 물가를 조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멋지게 재정 재건에 성공했다라고 평가했다.
 
공자는 관중을 칭송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공자가 보기에 관중은 예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검소한 사람도 아니었다. 더더욱 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는 공자가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였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제자들과 함께 관중을 논하며 최고의 인자(仁者)로 규정했다. 공자는 관중을 어질다고 칭송하기도 하고, 그릇이 작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공자가 보기에 관중이란 인간은 예를 모르는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보기에 관중은 위정자로서는 남을 해쳐도 앙갚음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공정했고, 한마디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공자는 관중은 환공을 보필하여 천하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그 은혜는 오늘까지 이어진다. 만약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야만족의 풍속을 강요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극찬했다. 차선(次善)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칭찬받는 것이 관중의 특징이다. 맹자는 자신의 도덕주의와 사상적으로 코드가 다르기에 관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깎아내렸다. 이는 아마도 공자와 달리 맹자가 역사에 다소 어두웠던 탓이기 때문일 것이다.
 
환공과 관중은 환공의 재위기간 기간인 42년 간 국정을 함께 논의했다. 관중에게 환공은 군주이자 친구였다. 친구는 잘 이끌어야지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기에 관중은 환공의 욕망을 긍정했다. 환공의 악습인 여자와 술·사냥을 모두 인정했다. 다만 군주는 안일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군주는 중요한 것을 잘하면 된다고 했다. 나라의 중요한 일이란 백성을 먹이는 일과 전쟁에서 패하지 않는 일이다. 공적인 일만 잘하면 사적인 욕망들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관중의 태도였다.
 
관중은 왕실이 부럽지 않을 만큼 재산을 모아 사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크게 비난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史記’). 관중은 기원전 645년에 현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관중은 죽으면서 환공에게 습붕(隰朋)을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며 간신 역아(易牙수초(竪貂개방(開放) 등 세 신하는 반드시 멀리하라고 경고하였으며, 포숙아는 정치에 어둡기에 절대 재상으로 임명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환공은 관중이 임종하면서 올린 간언을 듣지 않고 소인들과 정치를 했기에, 환공이 죽으면서 제나라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환공은 관중의 조언에 따라 습붕을 재상에 임명하는데 불행하게도 습붕이 국사를 맡은 지 한 달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할 수 없이 환공이 포숙아에게 재상직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포숙아는 굳이 사양했다. 환공이 역아·수초·개방 세 간신을 밖으로 내쫓는 것을 확인하고야 포숙아는 환공의 요청을 수락해 정사를 책임 맡았다.
 
환공 자신이 내쫓은 세 간신을 다시 불러들이자 포숙아는 그들의 퇴출을 여러 번 간청했으나 환공이 말을 듣지 않았고, 울분을 참지 못해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공도 병이 들었는데 당시의 명의 편작(扁鵲)이 환공에게 조속한 치료를 권했음도, 괜찮다고 미루다 병이 악화되어 관중이 죽은 지 2년 후 환공은 73세의 수로 운명했다. 환공의 사후 자식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환공의 시체가 67일간 방치되기도 하였고,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고 멸망의 길로 가 전()씨들이 강탈해 강태공이 세운 제나라는 기원전 370년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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