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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98] 깨진 유리 파편들 한가운데
그녀의 결혼은 죽었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8 06:30:10
 
 
그런데 살아 와서 실망했어? 의심부터 하는 너한테 변명 따위 않겠어. 네 멋대로 상상해.’
 
동우는 문을 부서져라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기막히고 억울한 건 동우가 될 것이다. 입장을 뒤집어 말문을 막는 일은 다툴 때마다 반복되는 동우의 재능이었다. 하운이 동우를 예측하는 것처럼 동우 또한 그녀를 정확히 파악했다. 동우가 몰아붙이면 하운은 후퇴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동우와 하운이 충돌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녁 아직 멀었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동우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정수기 앞에 서서 물을 들이켜고 있던 하운이 놀라 돌아보았다. 넋을 놓고 있다가 유령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하운은 유리잔을 쥐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남아 있던 물과 함께 손에서 미끄러진 컵이 발밑에 산산이 부서졌다.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서 있던 동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동우는 아내가 어떻게 나올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경계했다. 먼저 자백할 생각은 없었다. 아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남편은 모른 척 넘어가면 된다.
 
조심성 없기는. 저녁 준비되면 불러.”
 
유리 파편 한가운데 맨발로 서 있는 하운을 남겨 두고 동우는 등을 돌렸다. 서재의 문이 닫혔다. 저 남자가 세상에서 사라졌을까 봐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하운은 동우가 사라진 공간을 둘러보았다.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이 집은 더 이상 동우와 함께 밥을 먹고,함께 잠을 자고, 나란히 앉아 작은 것들을 공유하던 공간이 아니었다. 유리 조각들을 치우며 하운은 후회했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공항으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디제이의 멘트를 흘려보내야 했다. 라디오를 켜지 말아야 했다.
몇 시간째 냉장고 밖에서 방치된 생선회는 흐물흐물 살이 물렀고, 갈비를 담가 두었던 물속에는 붉은 핏물이 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물을 바쳐야 할 신을 잃은 광신도처럼, 하운은 칼로 저민 살과 핏물이 빠져 허옇게 바랜 고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 버렸다. 개수대로 벌건 핏물이 흘러 내려갔다. 그녀의 결혼은 죽었다. 허공에서, 1만 미터 상공에서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매장을 너무 오래 비웠다고, 토요일인데도 출근해야 한다고 동우가 말했다. 누워 있던 하운은 눈을 뜨고 3초쯤, 침실 앞에 서 있는 동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에 오렌지색 넥타이가 매달려 있었다. 늘 어둡고 무거운 것에 익숙하던 동우의 얼굴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점잖고 반듯하고 각이 서는 것, 권위를 내세울 만한 옷차림, 그것이 동우의 스타일이었다. 웃음이 터질 것처럼 넥타이와 동우는 화합하지 못했다. 아니었다. 하운의 편견이었다. 사실, 꽤 잘 어울렸다. 우미숙은 거울 앞에 동우를 세우고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그의 매력을 한껏 되찾아 주고 북돋아 주었을 것이다. 질투와 패배감이 뒤섞였다. 하운은 눈을 감고 등을 돌려 누웠다.
 
아프면 병원 가 봐.”
동우가 말했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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