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93] 함께 발가벗었던 시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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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면을 쓰고 운명을 비웃는가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18 06:30:10

하운이 일어나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혼이 다 내 책임인 것만 같아 미안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는 걸, 어제 동우를 보고 깨달았어요. 좋고 나쁜 걸 모두 끌어안을 수 있다고 믿은 건 오만이었어요.”

나는 하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사람 이야길 하는 게 아니잖아요.”

포트의 물이 끓다가 뚝, 스위치가 자동으로 꺼졌다.

“발가벗고 함께 누웠던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줘야 했어요. 당신이 느끼는 수치와 혐오를 온전히 내 몫으로 떠넘겼어요. 당신이란 남자.”

하운이 등을 돌려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직시했다.

“죽음을 핑계 삼아도, 그건 내가 당신을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거예요. 당신의 욕망을 존중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더 존중해야 해요. 당신이 최선을 다해 당신의 죽음을 연민하거나 당신의 목숨을 살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최선을 다해 내 삶의 자존감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여의도 한복판에서 옷을 홀랑 벗고 뛰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척해 주길 바랐던 건 욕심이었다. 하운의 말은 참혹할 만큼 내가 숨기고 싶은 과녁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하지만 긍정할 수만은 없었다. 두꺼운 가면을 쓰고서라도 나를 변호해야 했다. 그럴수록 내 밑바닥을 향해 추락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요. 난 당신에게 나빴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날 유혹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내 입을 열고 뛰쳐나온 말은 더욱 치졸했으며 나는 비열했다. 내 말에는 너도 즐겼잖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나의 인격이었던가.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든 변명하고 싶은 게 인간이다. 하운은 입을 하,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나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입을 열고 튀어나온 나에 대한 뻔뻔한 변호는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당신은 그런 적 없어요? 우리 모두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누구나 한쪽 눈을 감고 산다고요. 이중·삼중·다중의 인격을 감추고 자신만 정당한 척, 스스로 모순을 변호하며 살아요. 이왕이면 더 많이 갖고 싶어서, 가능하면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누구라도 최선을 다해 발버둥치고 살잖아요. 때로는 선량한 척, 진실한 척, 거리낌 없이 타인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옹호하는 게 뭐가 나쁘죠? 사랑받으려고 간악을 떨거나 위선과 거짓말을 너절하게 늘어놓기도 하는 게 인간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거짓투성이잖아요. 살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죠. 살아야 하는 게 우리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의무니까요. 에바도 말했잖아요. 인간은 가면을 쓰고 거짓조차 사랑하는 척, 운명을 비웃는다고 말이에요. 난 그동안 나쁘게 살아오지 않았어요. 당신처럼 나도 모순과 비겁함이 싫어요. 다만 절박한 상황에서 당신에게 한 번, 꼭 한 번 실수한 거라고요. 죽고 싶지 않아서, 죽는 게 두려워서.”

“실수? 단 한 번의 실수라고요?”

하운이 쏘아붙이듯 되물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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