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0] 아베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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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3 06:25:00

혁명 동지이자 첫사랑인 변태섭과 결혼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도무지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변태섭에게 갈수록 서운함이 쌓였고 그와의 잠자리가 불편했다. 섹스가 즐겁지 않았다. 아프고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게다가 두 번의 중절 수술에서 보인 그의 태도는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희숙은 변태섭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교회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그와 결혼해서 임신중절의 아픔을 반드시 회복해야 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고, 모두가 공평한 세상이 필요했다.

그래도 권지호가 좋았다. 그의 배려와 매너가 좋았다. 그가 결혼하자고 청혼하면 그때 고민할 거야. 객석이 조용해졌고 김근화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희숙은 우아하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돈과 여유가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공연은, 그냥 그랬다. 아는 노래는 아는 노래라 시시했고 모르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라 재미없었다. 권지호는 가끔은 눈을 감기도 했고 조심스럽게 희숙의 손등을 간질이기도 했다.

제목을 모르는 모차르트의 노래가 끝나고 김근화는 아주 천천히 노래 하나를 뽑아 냈다. 아베마리아. 희숙은 같은 제목의 노래가 수백 곡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처음 듣는 데도 사람의 마음을 여는 멜로디에 듣고 있던 희숙의 눈에서 갑자기, 까닭 없는 슬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절망과 슬픔, 허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었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신의 도움이 절실한 날이 있었다. 손잡아 달라 외쳤지만, 버리지 말라고 매달렸지만 외면당한 기분이었다. 매 순간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다. 아파도 아파하지 못하고 슬퍼도 슬퍼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했다. 사실은, 확신 없이 맹목적인 삶에 희숙은 지쳐 가고 있었다. 꿈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꿈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신앙도 무디어져 갔다.

어느 날은 길고 컴컴한 터널을 걷고 있었고, 어느 날은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었고, 어느 날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서 있었다. 희숙은 배고픈 맹수에 둘러싸여 벌벌 떠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 양이었다. 희숙은 성모의 품에 안긴 예수가 자신처럼 느껴졌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희숙의 어깨가 들썩였다. 슬퍼서 울었고 외로워서 울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권지호가 희숙의 들썩이는 어깨를 살짝 안았다.

두 번의 커튼콜로 공연은 마무리됐다. 객석에 불이 켜지니 눈물 자국이 선명했는지 권지호가 희숙에게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보고 오라 했다. 강당 로비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김근화를 보려는 관객들이었다. 무대 화장에 한껏 부풀린 올림머리 스타일이 우스꽝스럽긴 해도 연예인처럼 아우라가 다르긴 했다. 희숙이 권지호 곁으로 다가갔다. 권지호는 팔짱을 끼고 김근화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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