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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의 ‘법과 정의’…일본사(日本史)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16

신라에게 괴롭힘 당하던 일본…신라정벌 거짓역사 꾸며

일 역사서, 신라의 자국 공격 상세 기술…일제, 허구인물 창조해 삼한 징벌 주장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2-14 12:32:01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자의적 자료조작 상상초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를 정벌하고 지배했다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말하나 이것은 그들의 고대 역사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감추기 위한 수법이다. 오히려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일본을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은 고대 역사가 그 진실을 말해준다.
 
일본은 광개토태왕 비문(廣開土太王 碑文) 조작을 계기로 앞뒤가 맞지 않은 역사위조를 감행해 우리 역사를 왜곡시켜 왔다. 예컨대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오는 ‘백잔(百殘)’을 일본사가는 백제로 해석하나 한국사 어디에도 백제를 백잔이라고 칭한 예는 한 곳도 없다. 역사무지도 이쯤 되면 문제다.
 
일본은 제멋대로 역사를 조작해서 역사교재에 써 넣는 나라다. 그들은 “일거에 신라,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을 삼았다” 하나 백번을 말한다 해도 이는 전부 허구이다.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를 복속시킬 국력도 능력도 없었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더구나 고구려까지 갑진년(甲辰年. 서기 404년) 평양 부근까지 왜군이 북상해서 격전을 전개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광개토태왕이 왜를 칠 때의 수도는 한반도의 평양도 아니다.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는 “광개토태왕 비의 발견은 청조시대인 1882년에 발견됐다”며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학가 나가스카(中塚氏)씨도 “당시 일본은 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대군을 보내었다함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큰 거짓말은 통한다 하나 거짓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와가모리타로 교수는 “확실히 4세기에 일본이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日本每日新聞 1971, 8, 9, 日本史の虛像と實像).
 
고대 일본의 국가 상황을 고찰하면 왜가 백제, 신라를 격파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번 글은 광개토태왕 비문의 왜곡한 것을 정벌 역사를 중심으로 가야, 백제, 고구려 순으로 다뤄보고 져 하는데 신라가 일본을 정벌하고 지배한 그 진위를 분명하게 가리려 한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는 가공의 인물
 
먼저 일본이 얼마나 역사를 제멋대로 하고 있는가는 일본역사서가 8세기에 나온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4~5세기의 천황의 즉위나 사망한 연대가 서로 다르게 나와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에도시대(江戶時代)의 후반 이래 이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나와 있으나 광개토태왕 비문이 알려지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신묘년(辛卯年. 서기391년)에 따라 일본 고대 사상의 기년(紀年)이 재연(再燃)했다.
 
그것은 ‘일본서기’의 대 조선관계의 기사(記事)와 ‘고사기’의 분주(分註), 천황사거(死去)의 간지(干支) 등이 각각 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여러 각도로 문제에 매달려 오늘에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가 가공의 허구임도 밝혀지고 4~5세기의 후반부터 대 조선관계의 기사에 관해서 거의 사실을 바로 잡아가며 이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일본은 최근까지도 “야마도 조정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했다”고 했으나 4세기말~5세기 초의 왜는 고구려에 대한 문제로 가장 고심했는데 삼한 정벌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유민에 의해 신석기시대를 겨우 면한 일본이 고대 우리나라를 정벌했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이러한 일본이 삼한 정벌을 말하지만 이것은 주로 신라에 대한 전쟁으로 집약돼 왔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공 인물이다.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은 일본학자들도 받아들이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신공황후에 대한 일본사가의 견해를 종합하면 과거 일제 군국시대에 일본사가가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 통치했다 함은, ‘군국주의의 침략적 사기를 북돋기 위해 위조한 것’이라는 것이 다 알게 됐다.
 
신라가 일본을 정복했고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했다
 
야마도 조정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했다는 것은 일본학계의 학자들도 납득하고 있지 않다. 와가타로 교수와 나오기 고지로(直木孝次郞) 같은 이들은 “4~5세기 초에 왜는 고구려에 시달려 매우 고심했는데 삼한 정벌은 주로 신라에 대한 전쟁으로 집약돼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日本每日新聞, 1971,8,16 日本の虛像と實像).
 
‘신라정벌설’은 일본이 신라에 대한 문제로 고난을 당한 까닭에, 있지도 않은 정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지금은 아무리 억지로 역사를 왜곡해도 그들 자신들도 신공황후는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노우에(井上光貞)씨도 황실계도(皇室系圖)는 일본의 첫 번째 왕인 오진(應神)까지 대략 신용했다. 오진의 부모인 츄아이(仲哀. 356~362)와 신공황후는 허구라는 쓰다(津田)씨가 주장한 이래 정설로 돼 있다. (日本國家の起源, 204面).
 
한편 나카무라 신타로(中村新太郞)는 그의 저서에서 “일본이 당나라에 보내는 스가하라(菅原道具)가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일본해에서 신라 해군에게 피습될 위험이 큼으로 견당사(遣唐史)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 [日本と中國の2千年 260(面)].
 
이는 신라가 일본을 지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라가 실지로 일본을 지배했다. 당시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 것은 신라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은 신라를 정벌할 만큼 그런 국가체계나 국력도 갖추어 있지 않았다.
 
‘일본문화사’는 “신라의 태도가 오만해 천평(天平) 6년(734년) 12월에 신라 사절이 오고 그 이듬해 2월에 입경했는데 신라를 왕성국(王城國=天子의 國)이라 칭했음으로 이를 책하고 그 사절을 거절했다”고 전했다. 즉, 신라가 8세기에도 일본의 상국(上國)이라 칭한 것이다.
 
9세기에 와서도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했다. 서기811년 신라 해적선이 대마도(對馬島) 사세보(佐須浦)에 출현함으로 태재부(太宰府) 관내(管內)와 장문(長門), 석견(石見), 이즈모(出雲)등 각국에 경호령(京護令)을 내렸다. “신라의 적선(賊船)이 자주 우리의 변경을 위협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은 신라를 매우 두려워했다.
 
또 “신라인이 상업을 빙자하고 일본에 들어 와서 일본국정을 정탐했다”, “승화(承和) 10년 8월에 태재부가 정월 중순으로부터 8월 6일까지 멀리 신라측으로 부터 북소리가 들리고 황혼이 되면 또한 불이 보인다”고 했다.
 
실은 신라가 출병하지 않았으나 신라의 침략에 너무 과민신경을 쓴 탓이다. 그들은 또한 사자(使者)를 대신궁 외에 여러 신궁과 불상과 산릉에 파견해 신라의 퇴각과 국내의 평안을 기도 하였다.
 
신라내습 두려워 전국신사, 불각에 기원당부
 
신라의 내습을 두려워한 일본은 이를 방위하기 위해 정병(精兵)을 동원해 추토(追討)하고 져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도피함으로 부득이 죄수를 징발해 방위했다고 했다. (日本文化史, 第14章 百濟,高句麗及ぴ新羅との交涉,203面~4面).
 
일본역사서 ‘일본과 조선의 2000년/신화시대(神話時代)와 근세(近世)’에는 “886년에 건아(健兒) 이하의 병사를 동원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할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서국(西國-구주지방을 지칭한 듯) 각지에 배치하고 신라를 바라볼 수 있는 고지에 사원을 세우고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독경해 불(佛)의 보호에 의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위하고자 했다”고 돼있다.
 
또 “869년 5월에 신라의 해적선 2척이 하카다항에 침입해 견(絹), 면(綿)을 탈취해가니 일본정부는 신라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높아서 태재부의 관리를 질책해 이 방면의 군비를 증강하고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 석청수팔번궁(石淸水八幡宮)에 칙사를 보냈다”며 신라의 공격에 대처토록 했다고 적혀 있다.
 
아울러 “전국의 신사에 폐면(弊綿)을 봉수(奉修)하고 각지 사원에 금강반약경(金剛般若經)을 수법(修法)해 신라의 침입을 방위코자 했다”라고 씌여 있다. 이상은 일본의 학자도 그들의 저서에서 인정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日本と朝鮮の2千年/神話時代, 近世 83~84面).
 
이와 같이 신라를 두려워 할 때에 “신라에 잡혀갔다가 도탈(逃脫)해 돌아온 자가 ‘신라가 대선을 만들고 병사를 훈련 중’이라고 보고하니, 신라를 두려워하던 일본정부는 우사팔번궁(宇佐八幡宮)을 비롯해 전국 신사와 불각에 칙사를 파견해 신라의 내습을 방위하는 기원을 했다”고도 적혀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이 신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일본이 도리어 신라의 정벌에 고심(苦心)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본이 신라를 크게 두려워 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다면 일본이 그렇게 신라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세염(金世溓)의 ‘해사록(海槎錄)’에도 “오진덴노(應神天皇) 22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 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일본이 신라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일본을 크게 정벌한 일이 있었음으로 일본이 신라를 그렇게 두려워한 것이다. 여기서 ‘신공황후 정벌설’은 허구이고 시전비궁장(詩傳閟宮章)과 같은 기원사(祈願辭)일 뿐이다.
 
시전비궁장은 “노(魯)나라가 중국을 1000년 동안 호령하던 예맥(銳麥=濊貊)을 정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맥(銳麥=濊貊)이 도리어 노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이것은 예맥의 정벌에 고민하는 노나라가 예맥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祈願辭)를 지은 것이었다.
 
일본은 가야를 필두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항치 못하고 언제나 우리의 도움을 받아 발전해온 일본이 8세기에 와서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그 역사서에는 마치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고 지배한 양 조작하였다. 이것은 허구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시전비궁장도 일본이 신라의 정벌을 저항치 못해 전국 신사, 전국 불각에 기도 할 때에 신의 조화로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와 같은 기원사를 지어 읊은 것이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공황후 정벌설’도 삼류소설만도 못한 허구의 역사일 뿐이다. 이를 믿는 학자는 연구를 하지 않은 자다. 시전비궁장도 노나라가 역사를 조작, 왜곡한 것과 같이 일본도 이를 모방, 조작하여 일본의 인력으로 신라의 정벌을 막아내지 못한 고심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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