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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땅 간도대륙

태산(泰山)과 곡부의 공부(孔府)를 답사하다

오악지존(五嶽之尊)과 유학(儒學)의 중심지를 가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7-05 16:18:12

▲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우리가 숙박한 숙소는 소규모 호텔이었지만 아침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8시경 무거운 짐은 호텔에 맡기고 약간의 물건만 챙겨 작은 배낭을 메고 태산(泰山)을 오르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태산 입구 양편에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주차장에서 승차를 하니 소형 버스는 태산의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20분 후에 중천문(中天門) 광장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삭도(索道·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의 천주봉으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삭도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2시간이 지체된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태산 정상에 오르기를 그만 두고 중천문 일대를 둘러보았다. 동쪽 능선에 오르니 평평한 곳을 발견했다. 가지고 온 대추, 밤, 곶감, 사과, 포 등을 놓고 간단히 술 한 잔씩 올린 뒤 조국의 평안과 통일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천제(天祭)를 지냈다.
 
본래 태산은 산동성 화북평야의 가장 높은 산이다. 오악(五嶽) 중의 동악으로 남악은 형상(衡山·1,211m), 서악은 화산(華山·2,437m), 북악은 항산(恒山· 2,052m), 중악은 숭산(嵩山·1,368m)으로 태산은 오악 중의 우두머리 산으로 대종(岱宗)으로 불리었다. 북쪽에는 제나라가 번영하였고 남쪽에는 노나라가 번영하였다. 태산은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1987년 선정되었으며 진(秦) 시황제 이후 역대 72제왕이 태산에 와서 봉선(封禪)을 지냈다고 하였다. 역사상 태산이 중국의 중심 산악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원의 사람들이 태산을 숭배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산 정상부의 남천문(南天門)은 원(元) 시기에 건립돼 6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정상인 천상신부(天上神府) 옥황정(玉皇頂)에 이르는 길 양편에는 명승고적과 루, 정, 비석, 마애각서 등의 유적이 존재한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역대 제왕이 지내는 봉선대전(封禪大典)은 태안시 북쪽의 대묘(岱廟)인 천황전(天貺殿)에서 지냈다고 하였다. 한(漢) 시기에 창건된 건축물로 가장 크고 완전한 고건축 군으로 알려졌다.
 
우리 일행은 삭도를 타고 정상에는 오르지는 못하지만 계단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랐다. 계단 옆의 석벽에는 붉은 글씨로 각을 새긴 곳이 많았다. 오악 중 가장 높고 우러러 보는 지존(至尊)이라는 의미인 “오악지존(五嶽之尊)”과 태산이 신들이 만든 가장 우수한 것을 모아둔 것이라는 의미의 “조화종신수(造化鍾神秀)” 등과 같은 글을 새겨놓았다. 이와 같은 석각 글씨를 감상하면서 오르다가 계단 옆의 바위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이미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단풍을 구경하면서 천하의 명산으로 이름난 태산에서 따뜻한 가을의 한때를 보내고 하산하였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11시 30분에 곡부(曲阜)로 향했다. ‘대문구문화유지’를 통과하고 곡부에서 공부(孔府)로 가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해 ‘우육판면(牛肉板面)’이라 적은 식당 앞에 차를 세우니 제법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하는 음식이 수제 쇠고기 국수로 보였다. 1인분이 8위안이니 매우 싼 편이다. 우리는 푸짐한 쇠고기 국수를 너무나 맛있게 먹고 오후 2시에 출발하였다.
 
공림(孔林)을 지나쳤으니 거의 공부에 온 모양이다. 차를 주차시킨 뒤 마차를 타고 공묘(孔廟)의 출입문까지 가는데도 20분이 소요되었다. 마차를 끄는 나이 먹은 말들도 오후 땡볕에 피곤한 모습이었다. 3시에 입장권을 끊어 공부에 들어가니 천년이 넘는 측백나무, 향나무, 은행나무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니 공부의 장서루(藏書樓)인 규문각(奎文閣)이 나타나고 대성문(大成門) 안에는 대성전(大成殿), 침전(寢殿), 성적전(聖跡殿)이 배치되어 있었다.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 서무 등의 건축군이 위치하였다.
 
현재의 공부는 후한 말 환제(桓帝) 때인 서기 153년에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저택을 확장하여 건립된 3만7,500평의 면적에 620여 칸 규모의 건축물이다. 대성전 중앙에는 안회, 증참, 맹가 등 12명의 성현이 모셔져 있으며 본전의 앞뒤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한 석주가 10본 있었다. 좌우에는 각 4본의 석주에 1면당 9마리의 용을 8면에 새겨 놓았다.
 
우리는 넓은 공부에서 공자의 무덤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다녔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공자 무덤을 찾은 바가 있었던 박 사장도 못 찾겠다고 단념하였다. 오후 4시 30분에 공부를 나와 맹부(孟府)로 향하면서 오래된 역사의 단면을 되돌아보았다. 현재의 곡부시는 공부 지역이 중심지역이다.
 
서기전 2500년 전에도 곡부는 도읍지였다. 즉 신농제(神農帝·43년 재위·서기전 2517~2475)와 제소호(少皞 金天) 시기의 도읍지는 곡부였다. 200년 후 제익(帝益· 재위 서기전 2303~2298) 때의 도읍지도 곡부였다. 제우(帝禹)의 아들 하계(夏啓)는 왕위 승계에 불만을 품고 어머니인 사모무(司母戊)와 매형인 제익을 살해한 뒤 하(夏)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남편 제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곡부에서 제익과 함께 안양에 온 사모무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따라서 제익의 도읍지인 곡부는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자연 신농제의 유적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소남자 김재섭 선생은 곡부가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았던 아사달이라고 하였다. 김재섭 선생은 현재의 공부는 공구(孔丘)가 신농제의 유적을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오후 5시에 맹묘(孟廟)에 도착하였다. 공묘에 비하면 맹묘는 규모가 아주 작았다. 본래 맹묘는 1037년 송 시기에 맹자 능묘 옆에 건립하였으나 수해로 인해 1121년 지금의 장소에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맹묘는 2만4000평방미터이고 건축물은 64개이다. 진(秦) 이후 청(淸) 시기까지 비석 280여 개와 300여 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있었다.
 
맹부는 맹묘 서쪽에 있으며 2만1000평방미터에 대문(大門), 예문(禮門), 의문(儀門)이 있고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 만들어졌다. 공부에서는 공자의 장손만 대대로 살아온 반면 맹부에서는 맹자의 후손 모두가 살았다고 하였다.
 
해는 서산에 지려하고 맹묘의 대문은 닫혀있는지라 맹묘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맹묘 옆 건물의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가니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맹자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다보지 못한 맹부는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하였다.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다음 숙박지인 제남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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