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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의 음양오행 경제

중국이 미래의 글로벌 패권을 쥘 수 없는 이유

청나라 때부터 이어진 중국 관리·상인 간 돈·권력 유착 관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9-12 09:15:41

▲김태규 명리학자·칼럼니스트
한 때 수출대국이었던 중국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 쯤에 중국은 그야말로 수출대국이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이웃의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 나아가서 유럽 나라들에겐 너무나도 갖고 싶은 ‘꿈의 물건’들이었던 까닭이다.
 
얼마 전만 해도 ‘메이드 인 차이나’라 하면 조잡한 저가 물건의 대명사로서 쓰고 버리는 물건이었으나 당시의 중국산 물건은 품질을 넘어 희소성까지 갖춘 귀한 물건들이었다.
 
서양인들이 좋아했던 물건을 잠깐 제시해본다.
 
生絲(생사)꾸러미, 두 올로 꼰 명주실, 흰색 비단실, 색색의 비단실, 금실로 수가 놓인 비단, 다양한 색상과 문양의 직물, 두꺼운 비단, 아마와 면포, 사향, 안식향, 각종 장식천, 침대 장식품, 침대보와 수가 놓인 벽걸이용 태피스트리, 방석, 융단, 진주, 루비, 사파이어, 수정, 금속 그릇, 놋쇠 주전자, 도자기 등등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책이라든가 문방사우인 종이와 붓, 먹, 벼루, 사향이나 침향과 같은 향료 등은 당시 조선과 일본 등에서 널리 선호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먼 유럽에서 배를 타고 온 서양의 무역상, 처음엔 포르투갈, 이어서 스페인, 그 다음에 네덜란드와 영국 등등의 무역상들이 중국을 상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은으로 받고 물건을 팔았던 중국
 
사고는 싶어도 팔 게 없으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인데 단 한 가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銀(은), 즉 실버였다.
 
사실 서양인들도 처음부터 은이 남아돌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을 발견하고 채굴하면서 급기야 무역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엔 대량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1570년대의 포토시 광산(지금의 볼리비아)이 그것이다.
 
일본 역시 은 광산(1530년의 이와미 은광산)이 개발되면서 필요한 중국산 물건들을 다량으로 사갈 수 있었고 우리의 경우 은 대신에 저 유명한 고려인삼을 통해 중국과 무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명나라 시절의 중국에선 왜 그다지도 은을 좋아했던 것일까? 가령 중국에서도 은이 많이 생산되었다면 서양인들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은을 받는 거래를 별로 반기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조정이 세제를 개혁해서 모든 세수를 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초기에 세금은 곡식과 같은 현물 납부가 원칙이었고 경우에 따라 비단이나 화폐 등으로 내는 것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운반이 편리한 동전으로 내게 되었고 나중엔 무게에 비해 가격이 높은 은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이를 一條鞭法(일조편법)이라 한다.
 
은을 통해 화폐시장경제로 넘어간 중국
 
그렇게 되자 중국은 사실상 은에 바탕을 둔 화폐경제로 전환했고 이에 다량의 은이 필요해진 마당에 때마침 남미의 포토시 광산과 일본의 이와미 은광으로부터 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이 대단히 많이 필요해진 중국이었기에 은의 시세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아졌는데 이것이 바로 무역이 가능해진 바탕이 되었다. 서양 무역상들은 본국에서 저렴하게 사들인 은을 중국에 가선 비싸게 넘겨주었고 대가로 받은 중국산 물건들 역시 유럽에 가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최근 국제금융에서 흔히 하는 엔 캐리나 달러 캐리와 원리가 같다.)
 
당초 중국 명나라를 일으킨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모든 백성이 관리들의 계도 아래 태어난 동네에서 살면서 자급자족하는 경제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실천하려고 했다. 일종의 ‘유교식 공산주의’라 하겠다. (원래 유교의 이념은 공산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시장 화폐 경제
 
그렇기에 명나라는 해외와의 교역을 싫어했고 또 금지했으니 이를 해금정책이라 한다. 海禁(해금), 즉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 즉 해외무역을 엄히 금했던 것이다. 우리 식 표현으론 조선 말 대원군이 실시했던 쇄국정책이다.
 
해외와의 교역이 발전하고 늘어나면 자연히 상인들이 부자가 되고 그러면 주자학을 익혀 관리가 된 사대부들과 맞먹으려 들고 아울러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농촌경제가 시장경제로 넘어가면서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이가 커지는 것을 우려했던 중국 명나라였다. 경제가 정체된 상태에서 가난해도 좋으니 사농공상의 신분제 아래 얌전히 살다가라는 것이 중국 유교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게 되면서 경제는 급속히 시장경제로 바뀌어갔고 이에 조정에선 아무리 해외와의 교역을 막아도 바다로 나가서 한탕 해보려는 바닷가 사람들의 욕구를 막을 순 없었다. 간단히 말해 돈 되는 일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결국 중국 조정은 1567년에 가서 해금정책을 폐지했고 그 이후 경제는 급속도로 시장경제, 상품경제로 이행했으며 그로 인해 중국 경제의 생산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은이란 돈이 경제 내의 윤활유가 되어 경제를 원활하게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의 유통이 늘어나자 자본이 형성되었고 그러면 투자가 일어난다. 이에 대단위 비단공장이 생겨나고 벼농사 짓던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소비하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뽕나무를 심어 原絲(원사)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식량은 사서 먹으면 되는 식으로 바뀌었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대부 계층에게 말세가 온 것과 다름 없었으니
 
이런 식의 변화는 유교 지식인들에게 그야말로 말세가 온 셈이었다. 농부가 식량을 자체 생산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의 원재료인 원사를 생산해서 돈을 벌고 쌀은 사다먹게 되었으니 이건 정상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 또 그냥 농부가 아니라 자본력을 갖춘 부자 농부가 사업가로 변신해가는 것이 그야말로 못마땅했던 것이다.
 
경제가 시장경제, 화폐경제로 변해가자 사농공상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商人(상인)들이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유교 지식인 또는 사대부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갔다. 자칫 상인이 저들보다 위에 올라설 수도 있는 위험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유교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가 늘어나면서 백성들의 삶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부의 편중에 따라 양극화가 진행되는 폐단 또한 당연히 생겨났다.
 
결국 나름의 절묘한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으니
 
그런 뒤 명나라는 만주족에게 정복을 당했고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이 무렵이 되자 새로운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관리들에게 후원을 하거나 뇌물을 주었고 관리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상인들 특히 巨商(거상)들의 협조 또는 기부가 필수적이었다. 가령 홍수가 나서 다리가 무너지면 으레 지역의 거상들이 기부를 해서 다리를 복구하는 식이었다. 정부엔 그런 예산이 없었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 사대부 계층을 紳士(신사)라고 한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표현, 신사 양반이란 말이 그것이다.)
 
신사 계층의 기반은 농촌의 토지였다. 즉 지주계급이었으며 소작인들로부터 받는 식량을 돈으로 바꿔서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곤 자녀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갔다. 하지만 나중엔 신사층도 자녀의 일부는 공부를 시키지 않고 장사를 배우게 했다.
 
반면 상인들은 토지에 집착하지 않았고 뭐든 돈이 되는 것이면 사들이고 또 내다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상인들 역시 돈이 생기자 자녀의 일부를 장사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해서 관리로도 진출해갔다.
 
그러자 신사층과 상인층의 구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져갔고 섞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절 관리의 급여는 너무나도 적어서 금전적인 유혹에 약하기 마련이었는데 지역 상인들의 후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상인들은 돈으로 사업상의 利權(이권)을 얻었고 관리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致富(치부)를 했다. 돈과 권력의 유착, 또는 거래였다.
 
청나라 시절의 이런 타협과 결합은 당시 조선으로도 유입되었고 그 바람에 흔히 얘기되는 영조와 정조 이후로 들어오면서 일반화되었으며 특히 세도정치를 통해 극심해져서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중국식 부패의 원형
 
지금 말하는 이 타협과 절충이야말로 중국식 부패의 원형이라 하겠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 이후 공무원의 처우가 극적으로 개선이 되면서 대폭 줄어들었지만 중국은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하다.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이 방식으로 통치를 해가고 있으며 권력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과 현재 중국 공산당 통치의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중국 공산당은 국가 전체적으로 근간이 되는 사업의 경우 철저하게 국영기업을 통하고 있기에 공산당의 중소상인에 대한 통제력은 막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산당 간부라든가 관리가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권사업에 상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치부하는 것은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다.
 
중국식 부패가 이어지는 한 중국은 어렵다
 
나 호호당은 현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서 중국식 부패에 대해 나름 납득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나본 중국인들 역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탓에 중국이 향후 글로벌 세계를 이끌만한 자격을 갖추긴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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