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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77>

예맥조선, 중원(中原)대륙 지배한 강국이었다

전한(前漢)은 예맥(銳麥;濊貊)의 제후국(諸侯國)에 불과 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10-10 14:58:20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독일의 철혈수상 비스마르크는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제도권에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고 있고 어디가 잘못되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으며  지나(支那)와 일본이 조작하고 왜곡, 날조된 역사를 우리 역사인양 가르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나라 역사는 뒤엎어지고 갈갈이 찢어져 있다. 실제 있었던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과 천년왕국 낙랑국(樂浪國)도 서기전 1237년~서기전 32년까지 존속했다. 이것은 한서(漢書) 권(卷)28에 나와 있다. 
 
그 외의 기록은 서기전196년의 최숭왕(崔崇王)과 서기32년의 최리왕(崔里王)의 기록만 있을 뿐, 다른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다. 낙랑국은 만주(滿洲) 남부(南部)와 한반도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이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있다. 
 
왜(倭)는 서기전 52년부터 500년간 대륙에 있었고 일본의 국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타이완(臺灣)에 온 이후인 670년이다. 그 증거로 고찬의 고지도(古地圖)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그 지도가 있다. 일본국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양자강 이남에 왜가 있었다.
 
신당서(新唐書)권220, 일본전도(日本全圖)가 함형 원년(서기670년) 카히라코라이(賀平高麗)가 한어(漢語)를 배워 왜가 싫어서 670년에 처음 제정된 것이라 한다. 이 당시 일본은 타이완(臺灣)이었다. 필자도 지난해 숭대 박물관에 가서 그 지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왜는 당(唐)나라 때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일본으로 써도 좋다고 해서 쓰고 있으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왜인(倭人), 왜로 나왔던 것이 당(唐)때가 처음이고, 일본열도(日本列島)는 1403년 명(明)나라 때 일본국호 써도 좋다고 해서 쓰기 시작 했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지배를 받았는데, 거꾸로 왜가 삼국과 가라(加羅), 임나(任那), 모한(慕韓), 진한(辰韓)을 다스렸다고 왜곡(歪曲)하게끔 왜전(倭傳)에 집어넣고 일본에 건네준다. 역사뿌리를 아예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륙에는 그들이 흉노(匈奴)라 말하는 강력한 예맥조선이 있었고 동주(東周) 시대부터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맥조선(銳麥朝鮮)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여기에 한족(漢族)이 예맥(銳麥)과 겨룰 수 없을 만큼 예맥은 강대했고 한(漢)은 이에 못 미쳤다. 
 
그들은 한나라가 강한 나라인 듯 부각시키나, 한은 결코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대륙에는 강력한 예맥조선이 동주(東周) 시대부터 천년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은 고대 동이족 중 4300년 전에 지나문헌(支那文獻)에 나타난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뿐이라 하고 근세 인류학자들은 숙신씨(肅愼氏)가 모든 동이족의 시조(始祖)라 하기에 숙신씨(肅愼氏)의 분파인 맥족(貊族)이 세운 예맥조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맥은 같은 숙신씨(肅愼氏)의 분파로 대륙을 정벌했다
 
예맥은 3000년 전부터 구국(舊國)이라고 한 나라다. 예맥이 등장한 시대는 구국이 없는 시대이다. 예맥이 매우 강대함으로 지나인(支那人)들이 그 증오심은 이리와 늑대 같은 족속이라며 짐승의 이름을 붙였다.
 
이에 복초(伏草, 최인(崔仁)) 선생은 명칭부터 혁명한다 하시며 그 이름을 예맥(銳麥)이라 개칭했다. 즉, 예맥은 북방의 춥고 찬 지방에서 보리를 상식(常食)으로 하면서 예병(銳兵)을 거느리고 천하에 횡행하던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중국은 없다]의 저자 정희철 선생은 흉노(匈奴)의 시조는 색정(索靖)으로 서기전 2177년경 고조선 제3대 가륵(嘉勒)단군이 열양(列陽) 욕살 색정을 약수(弱水)로 옮기고 종신토록 감옥에 두었는데 후에 사면해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흉노에 관한 기록은 있어도 흉노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는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고 있는데, 필자는 흉노의 나라가 곧 예맥조선으로 보고 있다. 지나와 일본은 의도적으로 예맥조선을 숨기고 있는데 예맥과 흉노는 똑같이 강대한 기마군단으로 1000년 간이나 대륙을 휩쓴 예맥조선이기 때문이다. 전한(前漢)은 예맥의 속국과 같은 것이었다.
 
한고조를 배반한 노관(盧綰)과 위만(衛滿)이 반란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예맥의 보호를 받은 것이나, 한고조 4년에 연(燕) 침입 시, 용감한 기병(騎兵) 500명을 보내어 한(漢)을 도와준 것 등 한고조가 예맥의 군사적 원조를 받은 것은 예맥이 강국이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예맥조선의 주류가 흉노족으로 예맥과 흉노는 같은 동족임을 말해 준다. 이들은 원래 몽골고원 일대에서 세력을 키워 전국시대(戰國時代)인 4세기경에는 남하(南下)해 황하유역 일대를 휩쓸었던 부족국가가 아닌 강대한 대국인 예맥조선이었다. 
 
또한 서기전 3세기경 두만(頭曼)이 선우(單于)에 즉위한 이후 여러 차례 진(秦)이 침입하자 이를 반격하여 진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진이 멸망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 흉노는 한 족속이 아니라 바로 예맥조선이라는 국가로 보고 있다. 두만의 아들 묵돌(頭頓)이 선우에 등극하자 이들은 더욱 강해져서 서기전 209년에는 ‘월지국(月氏國)’을 토벌하고 천산산맥(天山山脈)과 감숙성 일대를 차지했다. 천산(天山)은 단군(檀君;탱그리)으로 천산(天山)에 살았고 티벳, 몽골 등 모든 민족이 이 천산에서 나온 민족들이다.
 
한(漢)이 예맥(銳麥)을 이길 수 없었다  
 
서기전 200년경에 접어들면서 예맥은 섬서성일대를 물밀듯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예맥의 막강한 위력 앞에 한(漢)나라 군대는 전멸하고 유방(劉邦)은 백등산(白登山)에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어 한족(漢族)들은 그들의 공주와 함께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멸족을 면했다. 
 
묵돌(頭頓) 선우는 한(漢)을 집어삼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돈황(敦煌)을 접수하고 누란(樓蘭), 오손(烏孫), 호갈 및 서역 26국을 차례로 정벌, 정복해 지배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함에도 서안을 중심으로 섬서성 일대의 조그만 도시국가에 불과한 한(漢)이 구석구석 군현을 설치해 광활한 대륙전체를 통치한 것처럼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나의 사가의 붓끝에서 제멋대로 각색한 결과이다. 사실 한은 예맥의 속방(屬邦)에 불과했다. 
 
이러한 한이 예맥과 대결해서 패함으로 공주(公主)와 많은 공물(供物)을 바침으로 멸족은 면했으나 예맥이 요구하는 조공(朝貢)의 액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한이 그 액수를 감당 못하여 예맥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일도 생겨났다. 즉 서기전177년에는 예맥의 우현왕(右賢王;서기전 174년~서기전 162년)이 군대를 이끌고 상군(上郡)으로 내려갔었다.  
 
태종(太宗) 효문제(孝文帝;서기전 180년~서기전 157년)는 예맥의 요구에 굴복해 자신의 딸을 노상(老上) 선우(單于;서기전 174~서기전161년)에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서기전 2세기에 접어들어 노상(老上) 선우(單于)가 죽고, 그 아들 군신(軍臣) 선우가 즉위하자 한의 경제(景帝), 유계(劉啓)는 공주(公主)를 바치고 양국관계는 돈독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한은 유철(劉徹)이 즉위하면서 서기전 141년 예맥을 배신하기 시작했다. 유철은 군신(軍臣) 선우를 암살하기 위해 서기전 133년 마읍(馬邑)에서 매복 작전을 펼쳤다. 
 
예맥과 한(漢)간의 조약을 파기하고 군신 선우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한을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면전을 시작했다. 유철(劉徹)은 위청 등을 보내어 대항했으나 부대가 마읍(馬邑)에서 전멸 당했다. 이 곳은 고구려의 옛 영토로 당(唐)이 침공해 고구려와 격전을 펼쳤던 곳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신라와 당(唐)간의 나당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역사를 연구하지 않은 국내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까지도 대동강 하류지역으로 보는데 이는 전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선우를 암살하기 위해 대동강 하류에 매복한 예가 없기때문이다.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보면 대동시 남서부에 마읍(馬邑)지역이 표시되어 확인할 수 있다. 위성지도로 추적하면 기록상 마읍성(馬邑城)은 오늘날 산서성(山西省) 삭주시(朔州市) 삭성구(朔城區) 마읍촌(馬邑村) 일대로 확인된다. 이곳이 옛 마읍인 것이다. 
 
그런데 군신 선우가 죽고 그 아들 이치사(尹雉斜) 선우가 즉위하면서 예맥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를 틈타 한무제(漢武帝)와 유철(劉徹)은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예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기전 121년의 일이다. 
 
이에 이치사(尹雉斜) 선우는 곤야왕(昆邪王)을 보내어 이를 막게 했으나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이끄는 한군(漢軍)은 예맥의 거점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선우로부터 처벌을 걱정한 곤야왕은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곽거병(霍去病)에 투항했다. 
 
이로 인해 감숙성 일대가 일시 한(漢)에 넘어 갔다. 여기에 기세가 오른 한무제(漢武帝)와 유철(劉徹)은 산서성 남부지방을 공격했으나 한의 군대가 모두 패하자 유철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수들을 처형했다. 이에 우거의 신하들은 유철을 죽이고 예맥에 투항했다. 
 
여기서 지나와 일본은 이 수십만 기마군단(騎馬軍團)을 흉노로 대체(代替)하고 있으나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며 지배한 것은 그들의 말하는 흉노 아닌 예맥조선으로 봐야 한다. 한서(漢書)권26에 의하면 한무제시대(서기전 142~87)에 조선예맥이 있었다고 했다. 즉 武帝時置朝鮮濊貊句驪蠻夷라 쓰여 있는 것은 고구려와 예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사학자(詐學者)는 전한(前漢)과 신(新)나라도 신라역사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는 지나 역사가 5%~10%도 아니 된다고 하는데 지나와 일본의 왜곡하고 조작 날조된 역사서만을 보고 이를 우리역사로 각인된 자학반도식민사관의 사학자(詐學者)와 이들의 거짓역사를 배워온 일반국민은 우리역사가 얼마나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모르고 있기에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 전통, 긍지,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역사는 연구하면 할수록 얼마나 위대한 역사인가를 알게 된다. [중국은 없다]의 저자이신 정희철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한무제 이후 ‘전한(前漢)은 신라역사’라 하고 있으며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신라 김씨임을 밝히고 있다.(정희철 [중국은 없다.] 144면147면 인용)
 
여기서 신라의 조상을 잠시 살펴보면, 배달국시대의 헌원(軒轅)까지 가지 않고서도 전국시대(戰國時代) 김일제전(金日磾傳)은 그는 흉노(匈奴;예맥)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던 용정(龍庭)에서 한으로 귀순해 시중(侍中), 상시(常侍)를 거쳐 투정후(秺亭候)에 봉(封)해졌다.
 
당시 김일제(金日磾)는 한무제의 유언에 따라 곽광(霍光)과 함께 한을 신탁통치(信託統治)했는데 그 후 곽광은 실각했지만, 신라 김씨들은 7대를 내려오며 돈황(燉煌)을 다스리고 이어 멀리 경조군(京兆郡)에까지 세력이 미쳤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경조군은 후한 때 옹주(雍州)에 속한 군으로 감숙성과 섬서성 일부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곳 옹주 일대에 ‘서라벌’이란 나라가 세워진 것도 바로 그 후 전한(前漢) 제10대 효선제(孝宣帝;서기전 73년~서기전 49년) 유순 때인 서기전 57년 박혁거세가 13세의 나이로 ‘서라벌’이란 나라 거서간(居西干)으로 즉위했다. 이 서라벌은 반도경주가 아니고 대륙이다.
 
한무제가 죽은 이후 전한(前漢)의 실권(實權)은 김일제(金日磾) 후손들이 완전히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무제의 사후(死後) 한(漢)역사의 이면은 바로 신라 김씨(金氏)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한편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金當)에 이르면 왕망(王莽)이 역사에 전면에 등장한다. 반고(班固;서기32년~92년)는 한서(漢書)를 쓰면서 후한서에서 김일제의 가계(家系)를 소상히 설명하면서도 유독 김일제의 손자이자 김당의 아버지에 대해 함구하며 밝히지 아니한다. 
 
반고(班固)는 왕망(王莽)을 소개하기를 제11대 효선제 (孝宣帝), 유석(劉奭)의 처조카요 제12대 효성제(孝成帝), 유오(劉驁)의 외사촌이라고만 할 뿐, 그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김당(金當)의 어머니는 남(南)인데, 곧 왕망(王莽)의 어머니라고(當母南卽莽母) 밝힐 뿐이다.
 
왕망은 김당(金當)과 형제지간인데, 왕망을 중심으로 한, 신라 김씨들이 결국 한을 멸하고 신(新)나라(서기8년~23년)세웠던 것이다. 신나라는 왕망의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한(漢) 제6대 유계(劉啓;景帝)의 6대손인 유현(劉玄)이 한(漢)의 부활을 꿈꾸며 난을 일으켰다. 신(新)나라는 이 반란으로 무너지고 왕망도 죽는다.
 
글을 맺으며 
 
그런데 유현(劉玄)의 휘하에 있던 유수(劉秀)라는 자가 유현을 제거하더니 스스로 한왕조(漢王朝)의 후예(後裔)라 칭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장안(長安)을 함락했다. 이 유수는 마침내 ‘적미의 난’을 진압하고 한조(漢朝)를 재건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광무제, 유수는 권력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新羅) 김씨(金氏)에 대한 정치보복을 무자비하게 한다. 이에 신라김씨 들은 이 엄청난 한란(漢亂)에 이름까지 바꾸며 요동(遼東)으로 피난했는데 그 주역이 바로 성한왕(星漢王) 김알지(金閼智)이었다. 
 
그 후 ‘서라벌’은 기림왕 10년인 307년, 국호를 다시 신라(新羅)로 정하게 되었다. 한편, 신라김씨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후한(後漢)은 그 후 힘을 길러 고구려(高句麗)에 도전하나 2세기말에 이르면 양국이 좌원(坐原)에서 국운을 걸고 두 차례의 격전을 벌였으나 후한은 고구려에 대패(大敗)하는데 그해가 서기184년의 일로 황건적이 일어난 해와 같은 해이었다.
 
이것은 좌원에서 패전이 장각(張角)의 대평도가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고 종국에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 일어나게 되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사실상 개막되고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曹丕)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주게 되었다.
 
사가(史家)들은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후한이 멸망했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지나가 표면상으로 말하는 것이고, 사실은 좌원에서 고구려에게 잇 달은 패전이, 후한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발생과 지나 삼국시대의 도래(到來)는 이에 따른 역사적 필연인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이다. 
    
대동역사(大東歷史)권3의 ‘후조선기(後朝鮮紀)’는 고구려의 좌원대첩(坐原大捷)은, 수(隨)를 멸망시킨 살수대첩이나, 당을 멸망의 일보직전까지 몰고 간, 안시성대첩에 버금가는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이상은 崔仁 [韓國學講義]36面~81面,  정희철 [중국은 없다] 139面~150面外, 다수 서적을 참조하고 본문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로마제국이 1500년간 역사, 전통, 긍지, 자부심을 중히 여겼던 것 같이 우리도 역사전통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이를 위해 지나와 사가와 한국의 이물(異物)들이 패배와 수치로 장식한 식민지사에서 하루바삐 벗어나야 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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