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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10-14 00:02:26

 
▲ 홍찬식 칼럼니스트(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한중일 3국 ‘빼앗긴 청춘’들의 각기 다른 사연
그들만의 공(功) 아니지만 한국 사회 장악한 586
명문대 입학 특혜, 취업, 양로 등 끝 모를 탐욕
민주화 보상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 이어지지만
철저히 귀 막고 있는 이들의 끝은 어디일까
 
얼마 전 TV 드라마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방영됐다. 평소 TV 드라마에 무관심한 편이지만 제목을 보고 일본의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대표적 시(詩)가 똑같이 ‘내가 가장 예뻤을 때’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쓴 조현경 작가도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제목을 따왔다고 했다.
 
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푸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갖고 태어난다. 이 점에서 신은 공평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전쟁과 빈곤의 시대에 태어나느냐,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느냐에 따라 명암이 확연히 갈린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아무도 친절하게 선물을 주지 않았어/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멋진 눈길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어’ 이바라기 노리코의 이 시 구절을 처음 읽고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 어리둥절했던 독자들도 시인이 10대를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보낸 것을 알면 곧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그야말로 꽃보다 예쁜 시절, 여자들에겐 또래 남자들의 은근한 눈길과 의도적 친절이 집중된다. 여자들만 누릴 수 있는, 이때가 아니면 찾아오지 않는 특권이자 행복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떠났고 거리는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버렸다. 러브레터나 생일선물 따위는 더 이상 없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시절을 잘못 만난 청년들의 상실과 불운, 분노에 대한 은유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큰 오점은 마오쩌둥이 벌인 문화혁명(1966-1976)이었다. 문화혁명은 명칭과는 정반대로 야만과 문화 파괴로 점철된 광란의 소용돌이였다. 그 시기의 기록문학으로 유명한 저작이 장융의 ‘대륙의 딸’이다. 이 책에도 1952년 태생으로 10대를 문화혁명기에 보낸 여류 작가 자신의 회한이 담겨 있다.
 
‘문화혁명이 지속되면서 국가경제의 대부분이 마비됐다. 내가 사는 청두의 경우 1년 동안 설탕을 구경할 수 없었으며 비누 한 조각 없이 6개월을 지내기도 했다. 학교 수업도 중단됐지만 책 음악 영화가 전무했으며 극장 도서관 미술관 찻집이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갈 곳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홍위병 활동에 뼈져들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오로지 마오쩌둥의 어록(語錄)과 인민일보 사설만 읽어야 했다.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경기 조차 경쟁심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중단됐다. 공원의 꽃과 잔디는 ‘가진 자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뽑아버렸고 새와 금붕어도 같은 이유로 사라졌다. 장융은 ‘문화혁명은 10대 청소년들의 사춘기를 망쳐놓으면서 우리들을 단숨에 성인(成人)으로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의 소설가 공선옥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 그가 10대 때였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10대를 헛되이 지워버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다면 나라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공선옥은 ‘80년 광주’를 꼽은 것이다.
 
사실 민주화운동은 80년대 대학생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60년대 대학생들은 4.19혁명을 일으켰고, 70년대 청년들은 숨 막히는 긴급조치에 맞섰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는 명동과 서울역 앞에서 크게 벌어졌는데 서울 시내에 직장이 있는 샐러리맨들이 대거 참여했다. 따라서 민주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작은 밀알들이 힘을 합친 모두의 결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가운데 현재 한국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은 80년대 민주화 인사들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젊은 시절을 던진 특유의 투쟁성과 정체성이 큰 기반을 이루고 있다. 586이란 말은 민주화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최근 민주화운동의 보상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다. 연세대 수시 전형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합격한 신입생들이 문재인 정부 들어 크게 늘었다는 소식이다. 2017학년도에는 3명에 불과했으나 문 정부 출범 이후인 2018학년도부터 3년 간 18명에 달했다.
 
합격자들은 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이 아닌 그들의 자녀일 게 분명하다. 아버지의 운동 경력으로 명문대 입학의 행운을 잡은 ‘아빠 찬스’다. 대학 측은 기회균형 전형의 여러 분야 가운데 하나로 민주화 분야가 있으며 일단 원서를 낸 뒤에는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등 다른 분야 지원자들과 같이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은 왜 민주화운동이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하느냐 하는 공정성 문제다. 대학 측 답변은 동문서답이다. 사회적 공감대를 지닌 독립유공자 후손 우대와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고 586들의 특혜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라는 반대 정서가 강하다. 대학도 586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민주당이 발의한 이른바 ‘민주 유공자 예우법’도 논란의 불을 더 지폈다. 자녀들의 대입 특혜 뿐 아니라 본인과 가족들의 의료, 취업, 요양까지 국가예산으로 지원을 한다는 내용이다. 즉각 “후안무치” “자녀를 위해 민주화운동 했다고 의심 받게 만드는 법”이라는 반발을 불렀다. 이제 ‘모든 걸 다 가진’ 민주화 세력이 끝 모를 과욕으로 치닫고 있음을 민주당만 모르고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시 마지막은 ‘그래 결심했어. 할 수 있다면 오래 살기로’로 끝난다. 젊은 시절을 빼앗겼던 만큼 더 길게 사는 것으로 보상 받겠다는 얘기다. 그것도 그냥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늙어서 엄청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화가 조르주 루오) 할아버지처럼’이다. 순수한 시인의 소망답다.
 
‘대륙의 딸’의 장융은 “공산주의 중국은 천국, 자본주의 세계는 지옥”이라는 선전을 끝없이 들으며 성장해오다 끔찍한 문화혁명을 겪은 뒤 “중국이 천국이라면 지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라는 강한 의문을 갖는다. 그의 꿈은 중국 밖의 세계에 나가는 것이었고 결국 영국 유학으로 실현된다.
 
한국의 ‘상실의 세대’ 정치인들은 어떤 지향점을 갖고 살아온 걸까. 여태껏 드러난 것만 보면 ‘제 식구 챙기기’ 등 권력 쟁취와 독점 욕구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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