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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0여 년 전 일이다. 일본 수도 도쿄 도심의 전자제품 유통 상가인 아키하바라(秋葉原)에는 늘 한국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일본 브랜드 제품을 하나라도 더 구매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당시 최고의 인기 상품은 소니의 비디오카메라, 조지루시(象印) 전기밥솥, 닌텐도의 비디오 게임기, 세이코 시계 등이었다. 당시 필자는 주재원 신분으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재도구를 일본 가전제품으로 채웠다.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삼성이나 LG 등 한국 가전제품은 보이지도 않는 구석 쪽에 자리 잡고 있어 소비자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이다. 수년 후 미국이나 유럽에도 체류해 보았지만,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난공불락의 일본 브랜드를 한국 상품이 따라잡는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격차가 그만큼 컸고, 현실은 암울했다. 입버릇처럼 일본은 싫다고 말하면서도 일제(日製) 앞에 체면과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일본인에게 자만과 긍지의 상징물인 소니가 삼성에 졸지에 무너지는 실로 기적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잃어버린 일본의 20년 과정에서 목격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본 가전 브랜드의 몰락이며, 이는 일본에 치명적인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일본이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도 한국에 넘겨준 전자제품의 위상을 되돌려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많은 일본의 전문가들은 삼성과 같은 한국 기업의 오너 경영이 일본의 CEO 위탁 경영보다 우월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추격해 오는 2등의 한국을 무리하게 따돌리기 위해 품질보다는 단순 기능 보완으로 무리하게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을 단축하려고 했던 것이 한국에 꼬리를 잡히고 만 꼴이 된 것이다. 세계 1등이 되는 것이 무척 어렵지만 1등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 또 1등에서 2등으로 내려앉으면 다시 치고 올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양국 가전 기업 간의 경쟁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며칠 전 타계한 삼성 ‘이건희’ 회장은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데 이바지한 불세출의 경영인이었다. 한국 기업이나 브랜드가 세계 1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준 그의 경영 철학과 비전은 탁월했다. 경제계의 거목을 잃었다는 점에서 안타깝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꿈과 자신감은 유지로 계속 남아야 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 글로벌 시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간판 기업이 있다는 것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니다.
다른 상품의 수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엄청나다. 해외 여러 나라에 주재하면서 한국은 몰라도 삼성을 아는 외국인들을 숱하게 많이 봐왔다. 삼성과 간판 기업이 없는 나라들이 지구상에 수두룩하다. 고인의 죽음 앞에서도 삼성의 공과(功過)가 도마 위에 오른다. 보편적인 국민 정서에서 보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이 회장 폄하 발언은 좀 석연치 않게 들린다. 삼류 행정과 사류 정치판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보면 씁쓰레하기까지 하다.
중국은 우리 턱밑까지 추격, 초일류 기업은 초일류 국민과의 합작으로만 가능한 시나리오
이 회장이 남긴 귀중한 유산은 또 하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된 진정한 극일(克日)의 모습이다. 걸핏하면 친일파니 토착 왜구니 하면서 삿대질하는 무리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이라 새겨볼 만하다. 일본과 관련한 말도 잘 꺼내기 어렵다. 심지어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주재만 하였더라도 친일 인사로 매도하는 판이다. 일본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으로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쉬운 것이 없다. 밖에 나가보면 일본의 벽이 매우 높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세계 많은 나라가 일본의 주장이나 논리에 더 귀를 기울여주고 있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객관적인 현상과 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말초신경이나 자극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진영의 틀 내로 끌어들이는 행위만큼이나 비겁하고 무모한 짓이 없다. 최근 꼴불견이 된 정의연 사건이나 한 원로 작가의 작심 발언 논란도 대부분 이러한 데서 연유한다. 더 당당해지고, 궁극적으로 우위에 서려면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일본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치밀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것이 일본을 유리하게 하는 것인가.
이 회장은 과거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비롯해 대학 수학을 했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원조 토착 왜구다. 그러나 해방 이후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한 대표적 사례를 만들어낸 한국인이 바로 이 회장이다. 삼성의 소니에 대한 완승과 반도체나 스마트폰 부문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우뚝 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상당수의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하지 않고 세계 1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 1등과 극일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한 개념이다. 아직도 대부분 품목에서 우리 기업들은 일본을 능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 장벽이 높음을 인정한다. 반면 무지할수록 일본을 우습게 알고, 깎아내리는 데에만 열중한다. 우리가 일본을 극복하려는 이유는 받은 치욕을 갚아주려는 것이 아니다. 국력이 일본보다 앞서고, 국민이 더 잘 살며, 글로벌 커뮤니티에서 이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일본을 제대로 아는 전문가들이 많아질수록 가능성이 커지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진정한 거인(巨人)이었던 이 회장이 남겨주고 간 유훈(遺訓)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단지 삼성이라는 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계 1등 기업은 물론이고 1등 국민, 1등 행정 혹은 정치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더 좁아진다.
단순한 격차가 아닌 초(超)격차를 가지지 않으면 후발주자에 먹히는 것은 불과 삽시간이다. 우리가 일본을 극복하려고 하듯이 우리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국의 위력이 날로 거세지고 있는 판이다. 더 많은 삼성이 우리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기업은 적폐 혹은 적대의 대상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간판이자 얼굴이다. 밖에 나가 무한 경쟁의 현장을 보면 실감하고도 남는다. 세상 굴러가는 이치와 형편을 간파하지 못하는 삼류 정부와 사류 정치의 행세로는 험난한 경쟁에서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 초일류 기업은 초일류 국민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기업들의 뼈를 깎는 자성과 분골쇄신은 이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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