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불 껐지만 아쉬운 택배 과로사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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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영 기자페이지 + 입력 2021-01-26 00:02:30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외부 활동을 줄이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면서 외출하지 않고도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비대면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에 지난해 택배 물량은 코로나 이전에 비해 큰 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소비 패턴이 변화한 탓인지 택배 물량 폭증에 따른 택배 노동자의 업무는 평균 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분류작업·배송 등을 위한 인력 역시 충분히 충원되지 않아 택배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일부 택배 노동자들이 숨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한 해에만 전국에서 16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사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문제는 더 이상 택배 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뜨거운 감자다. 이에 국회·정부는 택배 사업자, 택배 노동자, 소비자, 화주 등과 함께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21일 더불어민주당(민주당)과 국토교통부(국토부) 등에 따르면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는 이날 오전 민주당 당 대표 회의실에서 ‘과로사 대책 1차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번 합의에서 가장 쟁점이 된 내용은 분류작업의 책임 소재다. 합의문에 따르면 택배 분류작업은 ‘다수의 택배에서 타인 또는 본인(택배 노동자)의 택배를 구분하는 업무’로 규정됐다. 또 이에 대한 책임은 택배 업체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동안 택배 노동자들에게 과중한 업무 부담을 지우는 원인으로 지목돼 온 분류작업을 택배 노동자에게 넘기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택배 노동자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한 내용도 대거 포함됐다. 앞으로 택배 노동자의 작업 시간은 주 최대 60시간·일 최대 12시간을 넘지 못한다. 불가피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오후 9시 이후 심야 배송도 제한된다. 이로 인한 배송 지연은 최대 이틀까지 면책된다.

택배비·택배요금 거래구조도 손본다. 국토부는 근본적인 거래구조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 용역에 착수하고 화주가 소비자로부터 받은 택배비가 택배 사업자에게 온전히 지급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이번 합의를 통해 택배 사업자는 분류작업 설비 자동화 추진 계획을 수립키로 했다. 국회와 정부는 예산·세제 혜택 등을 통해 이를 지원할 방침이다.

분류작업 설비 자동화가 완료되기 전까지 택배 사업자와 영업점은 분류작업 전담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만약 불가피하게 택배 노동자들이 분류작업을 할 경우엔 적정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업계에 따르면 자동화 설비가 상당 수준 갖춰진 CJ대한통운조차 4000명 이상의 인력을 고용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합의문에는 ‘택배업체가 분류작업을 택배 노동자에게 시킬 경우 그 대가로 지급하는 비용 총액은 분류작업 전담 인력을 쓸 때의 인건비 총액보다 커야 한다’는 내용까지 담겼다. 사실상 택배업체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자동화 설비를 구축하는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으로 보인다. CJ대한통운은 택배 상자를 택배 노동자 5~6명 단위로 분류해주는 휠쏘터 등 자동화 설비 도입에 2년 반에 걸쳐 1400억원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비용 부담은 택배비 인상으로 이어질 것으로 점쳐진다. 택배업체들이 추가 인건비와 자동화 시설 투자비 등 막대한 비용을 감내하면서 택배 노동자에겐 작업 시간을 줄여 주고 소득을 보전해 주려면 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어서다. 늘어난 사업주 부담은 결국 요금 인상을 통해 소비자에게 오롯이 전가될 예정이다.

택배업체들은 이달 25일부터 다음달 20일까지 합의안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 이에 소비자들은 당장 설 연휴부터 더 느려지고 비싸진 택배 서비스를 경험하게 됐다.이번 합의를 통해 마련된 택배 노동자 과로사 방지 대책이 하루 빨리 자리 잡아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그러나 택배 사업자에게 택배 업무 전반의 책임을 모조리 지우는 것은 그간 칭송받아 온 국내 택배 서비스의 경쟁력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우려된다. 월 100만원을 받는 분류작업 전담 인력이 1000명만 늘어도 연간 120억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여기에 자동화 설비 마련 비용까지 더해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는 자연스레 택배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택배 사업자와 택배 노동자, 소비자, 화주 등 이해관계자의 서비스 만족도마저 저해시킨다. 당장 필요에 의해 합의문은 마련됐다. 우선 택배업체가 부담을 떠맡기로 했다. 그러나 택배업계와 관련 종사자들이 모두 만족하기까진 갈 길이 멀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선 좀 더 심도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오창영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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