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이 기자의 책캉내캉] 진리 깨닫는 데는 대가 따라… 그래픽노블로 읽는 ‘길가메쉬’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책·출판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수많은 상징 속에 숨은 진리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3-15 19:40:19

‘인류 최초의 이야기’라는 타이틀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래서일까. 땅의 시원을 밝히고 인류의 근원을 탐색하는 이야기는 출판계의 단골 아이템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한국어판이 최근 그래픽노블(만화)로 출간됐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옌스 하르더가 2017년 출판한 이 책은 성경과 또 다른 태초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완벽한 외모에 깃든 교만함

길가메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운 수메르의 도시 우루크의 왕이다. 우루크는 밀집된 인구를 가진 세계 최초의 국가로 꼽힌다. 길가메쉬라는 이름은 ‘조상은 영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길가메쉬는 실존 인물이라는 설과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어쩌면 둘의 혼합일지도 모른다.

길가메쉬 이야기는 기원전 21세기 경에 만들어진 수메르판본부터 가장 최근의 것인 기원전 14~12세기 표준 바빌론어 판본까지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왜 이토록 길가메쉬는 긴 세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쓰이고 읽힌 걸까. 현대에도 다양한 언어의 출판물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번에는 만화로까지 제작됐다.

길가메쉬 신화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진리의 단단한 알맹이를 품고 있다. 젊은 날의 길가메쉬는 신의 피가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기록될 만큼 그 시절 넘사벽의 엄친아였다. 키 크고 잘 생기고 힘도 셌다. 집안 배경까지 좋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서 자신의 힘을 믿고 백성을 괴롭히곤 했다. 보다 못한 하늘의 신 아누가 그에게 엔키두라는 친구를 선물했다. 신이 인간에게 친구를 벌로 내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길가메쉬는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엔키두가 나타나자 결투로 제압하고자 한다. 그러나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친구가 된다.

최고의 벌은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레바논의 삼나무 숲을 지키는 무서운 괴물 훔바바를 물리치러 떠난다. 20대 혈기왕성했던 길가메쉬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뜻대로 훔바바를 물리치고 원하는 만큼 삼나무를 벌목해서 돌아오는 길, 길가메쉬 앞에 여신 이슈타르가 나타난다.

여신은 길가메쉬에게 청혼하지만 그것을 물리치는 것도 모자라 여신의 소유물인 황소마저 죽여 없앤다. 분노한 여신은 길가메쉬의 친구 엔키드의 목숨을 거두어들인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징벌은 나쁜 환경이나 질병이 아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일이다.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한 길가메쉬는 낙담하다 못해 갑자기 철학적이 된다. 죽음에 대해 숙고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영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전갈부인에게서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에서 혼자 살아남은 불로불사의 인물로 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와 동일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우트나피쉬탐은 그를 찾아 온 방문객에게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그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조건을 건다. 하지만 긴 여행에 지친 길가메쉬에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 갈 즈음 우트나피쉬탐의 아내가 남편을 설득하고 길가메쉬는 가시덤불을 선물로 받게 된다. 그것을 쥐면 늙은이는 회춘하여 젊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얻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는 게 아니다. 늙은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젊은 몸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살아 있는 게 진짜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그리고 진리를 선취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길가메쉬는 기꺼이 가시덤불을 손에 쥔다. 가시가 손바닥을 파고들고 고통이 온몸을 죄어온다. 이 사건은 진리를 터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길가메쉬는 자신만 젊음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고향 우루크의 노인들에게 그것을 선물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길가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 뱀이 나타나 가시덤불을 삼켜 버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길가메쉬. 그러나 그는 뱀을 쫓지 않는다.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