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6] 조국과 국적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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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순이란 이름의 의미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3 06:30:10

- 나는 비비안이 헝가리에서 일을 하기 위해 독일에 온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독일어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가 말했습니다.

“난 독일을 떠나 본 적 없어. 할아버지의 아버지까지는 헝가리 인이었는데 전쟁 때 스위스로 가서 스위스인 할머니와 결혼했대. 할아버지는 독일로 와서 영국인 할머니와 결혼했고, 아버지는 독일 본토박이인 어머니와 결혼했지. 그러니까 내 안에는 아주 다양한 국적의 사람에게 헌혈할 수 있는 피가 저장되어 흐르고 있는 거야.”

비비안은 이렇게 말하고는 혹시 내가 오해했을까 봐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물론 농담이야. 수혈은 혈액형이 같으면 국적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지?”

이번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인 거니?”

내가 물었을 때 비비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리고는 “내 국적은 독일이야.” 하고 말했습니다. 조국과 국적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나는 한국인인데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비비안과 눈인사를 하고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뒤를 돌아보곤 했습니다. 가을 운동장에 걸린 만국기처럼, 비비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헝가리와 스위스, 영국과 독일의 국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습니다.

비비안의 성은 마시모입니다. 이름을 앞에, 성을 뒤에 쓰는 서양의 이름 표기법과 달리 헝가리에서는 성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비안 리는 리 집안의 딸 비비안이고, 오드리 헵번은 헵번 집안의 오드리인 것과 달리, 비비안은 마시모 비비안입니다. 마시모 가문의 딸 비비안인 것입니다. 내 이름 김갑순이 김씨 가문의 손녀 갑순이라는 뜻인 것처럼요.

갑순이라는 내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나는 갑순이란 이름이 촌스러운 것 같아서 부끄러웠습니다. 진희나 은아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나도 고운 이름으로 다시 지어 달라고 할아버지께 몇 번이나 졸랐습니다.

“갑(甲)은 천간 중 으뜸을 가리키며 순(順)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뜻이니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름을 가진 거란다.”

할아버지는 철없는 손녀에게 이름의 뜻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입술을 쏙 내밀었습니다. 괜히 서러워져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엄한 분이었지만 내게는 한없이 자상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뜻을 거스르고 이름을 불평하자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맞게 생년월일을 따져 너에게 꼭 맞춰 지은 이름이다. 너의 부족한 기를 보해 주고 넘치는 기를 원활히 흐르도록 돕는 이름인데 어찌 다른 이름이 필요하단 말이냐!”

호된 꾸중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이름에 대한 불만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소망이 담긴 내 이름과 달리 나는 지금껏 으뜸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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