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尹대통령·李대표 왜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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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정치전문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5-02 00:02:40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육군 장성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영국령 싱가포르를 전격 침공했다. 영국군은 패했으며 사령관 아서 퍼시벌(Arthur Percival)이 항복 회담에 나섰다. 퍼시벌과 만난 도모유키는 얘기가 길어지자 이렇게 말했다. “시끄럽고, 예스카 노카(항복할거야 말거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영수회담 현장. 22대 총선에서 범야권 190여 석 확보라는 대승을 거둔 이 대표는 국가원수를 앞에 앉혀 놓은 채 장장 15분 동안 모두발언을 이어 갔다. 대한민국 역대 영수회담은 물론 해외 영수회담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의 가족 안위를 염려하는 듯 아닌 듯 그런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도 내놨다. 이 대표는 “이번 기회에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들도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라며 “채 해병 특검법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적극 수용해 주실 것을 요청드린다”고 했다.

또 “국정 방향타를 돌릴 마지막 기회라는 그런 마음으로 국민들 말씀에 귀 기울여 달라”며 전 국민 1인당 25만 원 지급이 골자인 민생회복지원금 등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 수용을 촉구했다.

적잖은 국민이 이 대표의 태도를 두고 대통령과 국정 방향을 논의하러 온 제1야당 대표가 아닌 패전 직전 장수를 만나 항복 재촉하는 승장(勝將)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부에선 상대 측 가족을 언급하는 건 도를 넘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민화 이후 역대 우리나라 영수회담을 살펴보자. 1996년 4월18일 김영삼(YS) 대통령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 총재와 만났으나 무언중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없었다. 김대중(DJ) 대통령도 이회창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와 2000년 한 해에만 7차례 회동했으나 국정을 제외한 상대 가족 사법리스크 따위의 얘기는 없었다. 양측은 2000년 6월 회담에서 의약 분업을 예정대로 추진하되 약사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하면서 의료 대란의 출구를 마련했다.

이명박(MB) 대통령은 2008년 9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에서 세계 금융위기 공동 대처 등 7개 항목의 합의를 이뤘다.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 대연정을 논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 대표와 함께 만나는 3자 회동을 가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2주가량 앞둔 2018년 4월13일 홍준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표와 마주 앉았다. 모두 ‘가족’ ‘마지막 기회’ 등의 살벌한 얘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해외의 사례를 보자. 미국의 영수회담은 도리어 자유분방하고 허심탄회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2011년 6월18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 수장인 존 베이너 하원 의장과 워싱턴 D.C. 인근의 앤드루 공군지기 골프장에서 4시간 동안 ‘골프 회동’을 가졌다. 민주당·공화당은 당시 재정적자 감축안 및 국가부채 한도 증액 등의 문제를 두고 격돌하던 상황이었다.

오바마는 정적 베이너를 카트에 태워 직접 운전하는가 하면 베이너의 등을 툭툭 치는 등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속내를 터놨다. 오바마·베이너 조와 조 바이든 부통령·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 조가 맞붙은 골프 대결에서 승자는 오바마·베이너 팀이었다. 내기 골프에서 이긴 오바마·베이너는 각각 2달러씩을 나눠 가졌다.

미국 영수회담도 우리처럼 대체로 유의미한 성적을 내진 못했다. 그러나 압박이 아닌 마음으로 추진된 협치 노력은 종종 여야의 벽을 무너뜨리고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15년 10월 민주당·공화당은 국가부채 한도를 증액하고 2016~2017년도의 2년치 예산안을 한꺼번에 편성하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같은 해 9월 양당은 이란 핵합의안 통과에도 의견을 모았다.

그나마 이번 영수회담에서 의견이 일치된 사안이 있는 건 성과라면 성과였다. 회담 후 이뤄진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차담회와 관련한 별도의 합의문은 없다”면서도 “합의에 이르진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 한 부분은 있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이 대표가 윤석열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의료 개혁은 시급한 과제로서 윤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영수회담은 앞으로도 종종 이뤄질 전망이다. 이 수석은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 지도 체제가 들어서면 (여야 대표 및 대통령의) 3자 회동도 할 수 있기에 어떤 형식이든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향후 영수회담에서는 가족 안부를 묻거나 ‘마지막 기회’가 언급되는 살벌한 풍경은 사라지고 오로지 민생을 위한 건설적 논의만이 있길 바란다.

오주한 정치전문기자 jhoh@skyedaily.com 기자페이지 +